▲<푸른 섬 나의 삶> 책 표지.
오마이북
많은 사람이 흔히 백일몽으로 그치는 일을 직접 행동으로 옮긴 사람이 있다. 바로 <푸른 섬 나의 삶>의 저자 조남희씨다. 30년이 넘도록 서울에서만 살다가, 삶이 행복하지 않다고 느껴서 제주로 왔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의 제주 정착 과정을 <오마이뉴스>에 <서울 처녀 제주 착륙기>라는 제목의 기사로 연재했고, 이를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야근과 회식에 스트레스는 쌓여가고, 출근이 점점 더 싫어지는 괴로운 일상. 주차문제로 이웃과 잦은 시비를 붙고, 반복되는 일상을 '그냥저냥' 살아가며, 이런 하루하루를 '마약같은 월급' 때문에 견뎌내는 삶. 무언가에 끌려가듯 '버티는' 시간 속에서, 결국 모든 것이 '선택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고 저자는 끝내 사표를 낸다. 2012년 6월, 주말여행으로만 가던 제주도에서 아예 살기로 마음을 정한 것이다.
1년치 방세로 170만원을 내고 얻은 10평짜리 단칸방. 월세로 계산하자면 약 14만 원이니까, 서울에서 원룸 월세 40만원을 지불하던 삶과는 이미 시작부터 다른 셈이다. 그로부터 몇년 전, 여행으로 제주도에 들렀을 당시 게스트하우스에서 '한라산 야간등반(한라산소주를 밤늦게까지 마시는 일)'을 하다가 얻은 인맥으로 순식간에 계약한 집이라고 한다.
서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도시가스가 아닌 LPG 가스로 난방을 하다가 가스통이 텅 비어서 추위에 떨고, 태풍에 무너진 도로에서 맨손으로 토사를 치우기도 한다. 지인과 산책을 나섰다가 숲길에서 한참을 헤매기도 하고, 어렵게 따온 고사리가 널어놓은 돗자리와 함께 통째로 사라지는 사건도 겪는다. 밤 9시면 식당을 비롯한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닫고, 대중교통으로 원하는 목적지에 이동하는 일도 결코 쉽지가 않다.
치킨 배달이나 홈쇼핑에서 물건을 '지르던' 것은 먼나라 이야기가 되고, 몸빼바지가 생활패션으로 자리잡는다. 그럼에도 저자는 "당황스러울 때도 있지만 제주를 배워가는 과정이 재미있다"고 적었다. 본문에서 묘사한 제주도 적응기는 마치 한 편의 긴 그림일기를 보는 것 같다. 좌충우돌 온갖 사건을 겪으면서도 소소한 즐거움으로 점차 물들어가는 일화들이 잔잔하면서도 뭉클하다.
"나는 제주에서 또 하나의 섬이었다"책에서 묘사하는 제주도에서의 생활은 그저 즐겁기만 한 '파라다이스'가 아니었다. 태풍이 한반도를 향할 때면 오들오들 두려움에 떨어야 한다. 집 대문이 무너지는 경우도 있고, 아스팔트 도로가 움푹 패이거나 신호등이 쓰러질 정도로 직접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저자는 제주로 온 이후에 외로움을 겪은 일도 고백한다. 여유를 찾기 위해서 제주 도심에서 떨어진 곳에 거주지를 정한 것이 이유였을까. 뿐만 아니라, 제주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동료 이주민들을 보며 홀로 남겨진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섬에서 '최소한 삼대는 살아야' 제주도민으로 인정하고, '육지 것'이라며 타지인을 경계하는 현지 분위기도 설움을 부추긴다.
결국 힘겹게 군산에 올랐고 시간이 되어 친구를 제주공항까지 바래다줬다. 친구는 비행기를 타러 들어가고 다시 나 혼자 남았다. 적막했다. 제주공항 활주로보다 길고 텅 빈 자국이 내 가슴에 남은 듯했다. 올 땐 둘이었는데 갈 땐 혼자였다. 공항에서 집까지 40분, 먹먹한 가슴을 꾹꾹 눌렀다.운동화를 빨다가 울어본 적이 있는지? 빈집에 돌아와서 토사를 치우느라 엉망이 된 신발을 빨다 말고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제주에서 또 하나의 섬이었다. (본문 43쪽 중에서)여기저기서 사람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서울을 벗어나니, 만남과 헤어짐이 더 큰 의미로 와닿게 된 것이다. 바쁘게만 살아가던 삶에서 여유를 찾으니 마음의 소리가 더욱 크게 들린 결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만만하지 않은, 제주도에서의 삶을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많다. 수박을 선물하자 호박 두개를 가져다주는 이웃 할머니의 따스한 마음, 편리한 생활 대신 얻은 마음의 여유, 산지에서 직접 맛볼 수 있는 다양한 먹거리까지. 하지만 무엇보다도 저자를 사로잡은 것은 따로 있었다. 제주도의 작은 산을 뜻하는 '오름'들에 오르면서, 사시사철 변해가는 풍경에 마음을 빼앗기자 저자는 드디어 '여기서 살아보자'고 결심을 굳힌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언덕같은 낮은 산의 경치가 눈앞에 아른거리고 멀리서 조용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다.
오름을 걷다 보면 어느새 토닥토닥 위로를 받는 느낌이다. 누군가에게 상처받아 마음이 아플 때, 그립고 생각나는 이가 있을 때, 나는 오름에 오른다. (중략) 용눈이오름은 속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눈물을 보여도 탓하지 않고 조용히 들어주는 친구 같은 존재다. (본문 89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