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호 희생자 김유민양의 아버지 김영오씨
이영광
- 단식할 때 일부 학생들이 딸이 돼주겠다고 했다는 내용이 있던데, 그때 심정이 어땠나요?"그때 유민이 나이와 같은 고등학교 2학년 아이들이 학교에서 단체로 오거나, 개인적으로도 많이 왔어요. 그래서 '딸이 되겠다'며 '힘내라'고 할 때 고맙고 감동적이었어요. 여학생이 많았는데 남학생도 더러 있었어요."
- 단식을 46일 하셨어요. 처음엔 '며칠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하셨다고. 아마 25일 정도부터 혼자 하셨잖아요. 혼자 남으셨기 때문에 아버님께서 단식을 중단하면 특별법이 통과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버티신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처음엔 3일만 하면 될 거라며 국회에서 10명, 광화문에서 5명, 이렇게 15명으로 시작했어요. 지난해 7월 16일이 여야가 협상 하는 날이었거든요. 그때까지만 버티면 될 거라고 해서 그 달 12일에 국회로 와서 이틀 농성했는데 안 통했어요. 묵살된 거죠. 그래서 7월 14일에 단식하기로 결정했어요.
100일 위령제, 그리고 7·30재보선이 이어지면서 시간만 계속 흐르더라고요. 그달 25일쯤 유가족은 저 혼자 남고 옆에 도철 스님이 계셨어요. 도철 스님은 32일째 그만 두시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혼자였죠. 도철 스님이 옆에 계실 때는 의지가 됐는데 혼자 하려니 두렵기도 했어요. '이러다 쓰러지면 유가족이 지는 건데 절대 쓰러지지 말자'고 생각했어요. 어거지로 버티다 제가 죽으면 (결국) 지는 거잖아요. 그래서 의지력으로 버틴 것 같아요."
- 언제 가장 힘들었나요?"3~5일 때는 배고픔으로 힘들었어요. 배가 무지 고파지는 단계더라고요.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배고픔은 잊어 버려요. 10일쯤부터 이가 아프기 시작했어요. 앉아 있으면 허리나 관절이 아프고, 두통은 말도 못해요. 그리고 살이 없으니 갈비뼈가 장기를 찌르기도 했어요. 그래서 힘들었죠."
- 책에 보면 7월 재보선 결과 때문에 힘드셨다던데. "재보선에서 야권이 참패했잖아요. 결과 보고 실망을 많이 했어요. 김한길·안철수 대표가 너무 안일하고, 무능하게 대응했기 때문에 진 건 사실이죠. 너무 힘들 때 도철 스님이 씻고 오자고 해 절에서 씻고 내려오면서 오히려 마음이 놓이더라고요. 국민에게 야당이 완전히 지는 걸 보여줘야 된다고 느꼈어요. 지면 정신 차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전화위복이 되어 제대로 싸우길 희망했어요. 그러나 7개월이 흐른 지금도 똑같잖아요. 너무 무능해요."
- 2차 합의 당시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가 아버님께 설명하러 왔을 때 비판을 많이 하셨다던데, 어떤 상황이었어요?"1차 합의는 유가족이 반대해서 무산되고, 2차 합의가 나왔죠. 2차 안을 가지고 분향소에서 유가족들을 만나기 전에 제게 먼저 설명하겠다고 들른 거죠. 그래서 봤더니 저희 요구보다 너무 저조했던 거예요.
'이렇게 하면 특별검사 임명권을 여당에게 주는 것밖에 더 되냐? 차라지 안 하는 게 낫다'고 하니 '더 이상 협상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협상을 하셔야지 왜 (유가족을) 설득하러 오십니까? 의원님은 협상을 하셔야 하는 겁니다' 등을 얘기했는데도 더 이상 '협상 안 된다'는 말만 하는 거예요. 그래서 탁자를 치며 '제가 싸워서 만들 테니 당신들은 빠지세요'라고도 했어요."
- 박근혜 대통령이 만나주지 않을 걸 예상하셨을 텐데 청와대는 왜 가셨어요?"제가 20일쯤 단식한 뒤 간 것과 40일 다 되어 가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만나 달라고 또 간 거예요. 만나서 따지거나, 협상하려는 것이 아니라 빌려고 했어요. '대통령이 울면서 유가족이 원하는 특별법 만들어 준다고 했는데 왜 협상을 안 해주냐? 그리고 민간이 참여해서라도 진상 규명하겠다고 했는데 그 약속 좀 지켜 주시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경찰들이 막았죠. 편지를 전달했지만 받지도 않고, 면회 신청서도 썼는데 묵살된 거죠. 저는 싸우러 간 게 아니에요."
- 참담했을 것 같은데."이런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지만 자식이 부모에게 실망해서 의절하겠다는, 그런 느낌이었죠. 이제 대통령에게 부탁 절대 안 할 겁니다. 해도 만나주지도 않고 들어주지도 않을 거고... 했던 약속도 자기 일 아니라고 발 빼는데 부탁할까요? 안 하죠. 할 필요가 없어요. 똑같더라도 국회의원들에게 하는 게 낫죠."
- 프란치스코 교황과의 만남이 참 감동이었는데 그날을 얘기 해주세요."지난해 8월 16일 광화문에서 시복 미사가 있다는 것을 8월 초 신부님들께 들어서 교황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고, 교황께 서신까지 보냈어요. 그러나 답장이 안 와서 조바심이 났었어요. 그래서 못 만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면서도 '만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드는 거예요. 당시 방송에서 보도한 교황의 모습 때문이에요. 매일 한 번씩 (세월호 상황을) 보고 받았대요. 관심이 많으시다는 생각에 만나주실 거라 생각하면서도 답장이 없어 마음 한편엔 안 만나 주실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죠.
8월 16일 당일 시복 미사할 때 한 바퀴 돌아 유가족을 보고 차에서 내려 걸어오실 때 억눌렸던 감정이 복받쳐 오르는 거예요. 대통령은 저희를 안 만나 줬는데, 교황은 내려서 오니 복받쳤죠. 유민이 생각도 나고... 너무 감사해서 눈물 밖에 안 나오는 거예요. 그때 유가족들도 많이 울었어요."
"머리 한 움큼씩 빠질 정도로 고생"- 박 대통령님과 비교됐겠어요."많이 됐죠. 박 대통령은 단식까지 하고, 청운동까지 찾아 갔는데도 절대 안 만나줬잖아요. 근데 교황은 오시자마 세월호 유가족부터 찾았고, 가시는 날까지 언급하셨죠. 힘없는 저희를 보살펴 주시고, 기도해 주시며 떠나셨기 때문에 (박 대통령과) 비교가 되죠."
- 박 대통령이 특별히 뭘 안 했더라도, 유가족을 만나줬다면 상황은 달라졌겠네요."네, 달랐을 거예요. 대통령이 저희를 만났다면 여당이 (유가족을) 무시 안 했겠죠. 여야협상도 원활했을 텐데... 만난 것과 안 만난 것의 차이가 커요."
- 단식을 중단하고 병원 계실 때 아버님에 대한 온갖 유언비어가 떠돌았잖아요. 그때 한 인터뷰에서 "광화문에서 단식할 때보다 더 힘들다"라고 하셨는데."그때가 오히려 더 힘들었어요. 병원에 간 첫날부터 시민이 (병원에) 전화해서 저 내보내라는 거예요. 단식하다 쓰러져서 사경을 헤매던 사람에게 할 소리인가요? 제가 신상도 털렸잖아요. 얼마나 제가 힘들었냐면, 머리가 한 움큼씩 빠질 정도로 고생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