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시대 내시(환관)의 초상화. 사진은 종이를 발명한 내시로 알려진 채륜의 초상화다. 후대 사람이 그린 것이다.
위키피디어 백과사전 중국어판
장양이 궁에 복귀한 것은, 환제의 죽음을 계기로 두 명의 황제가 1년도 안 돼 교체되고 뒤이어 영제 황제가 새로운 황상으로 등극한 뒤였다. 즉위 당시 영제는 열세 살이었다. 황제 자리에 오르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직접 권력을 행사하기는 힘든 나이였다.
이런 점을 이용해서 권력을 잡은 것이, 황제보다 21세 연상인 장양을 비롯한 십상시였다. 이들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황제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렸다. 황제가 유흥에 빠져 정치에 신경을 쓰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다.
다른 때 같았으면, 황제가 유흥에 빠지고 내시들이 정권을 담당하더라도 국가가 그럭저럭 유지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시기는 그렇게 한가로운 때가 아니었다. 중앙집권이 약화되고 지방분권이 심각한 나머지, 지방 할거의 양상까지 나타나던 때였다. 지방 세력인 호족들의 할거 때문에 황제의 명령이 지방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던 때인 것이다.
지방 호족들이 황제 권력을 위협하는 상황 속에서, 십상시는 황제 권력을 사수하기보다는 자신들의 권력 장악에만 열을 올렸다. 국가나 황실의 운명을 내다보는 거시적인 시야는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황제가 그저 유흥에만 빠져 지내기를 희망했다. 이런 그룹이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를 장악했으니 나라가 어느 방향으로 흐를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십상시가 국정 농단을 일삼던 영제 시대에, 후한 정부는 결과적으로 중요한 실책을 범하고 말았다. 지방 할거를 막겠다고 벌인 일이 도리어 지방 할거를 더욱 더 촉진시켰던 것이다. 이 시기에 중앙정부는 지방 장관인 자사(刺史)의 명칭을 주목(州牧)으로 바꾸는 동시에, 주목이 군사감독관인 감군사자(監軍使者)를 겸하도록 했다.
이것은 지방관이 행정권과 군사권을 함께 행사하도록 함으로써 지방 호족을 좀 더 효율적으로 견제하게 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이 조치는 도리어 지방관들이 중앙에 반기를 들게 만들었다. 지방 할거 양상이 심화되던 때였기 때문에, 지방관들이 이 조치를 악용해서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시켜버렸던 것이다.
위의 조치는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결과로 이어졌고, 그것은 후한의 몰락을 한층 더 가속화시키고 말았다. 십상시가 국정을 농단하던 때에 이런 실책이 나왔다는 것은, 이들이 정치 흐름을 거시적으로 인식하지 못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자기 그룹의 권력 강화에만 주된 관심을 기울였으니, 어찌 보면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VIP'의 리더십이 약해지면... 어디서나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