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김치양 열전.
<고려사>
그렇지만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개의치 않았다. 남편인 제5대 경종 임금이 죽고 천추태후가 대비가 되자, 이들은 궁에서 불법적 만남을 가졌다. 김치양이 궁궐에 출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김치양은 머리를 깎고 승려를 가장해서 태후의 처소를 출입했다. 두 사람에 관한 소문은 널리 퍼졌다. 그것은 천추태후의 오빠이자 당시 임금인 제6대 성종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성종은 소문의 확산을 막고자 김치양에게 곤장을 친 다음 귀양 보냈다.
참고로 천추태후의 남편인 경종이 죽은 뒤 태후의 오빠인 성종이 임금이 되는 것은 조선시대 관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고려시대 왕실에서는 근친혼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런 일이 불가능하지 않았다. 천추태후는 태조 왕건의 손녀이자 남편인 경종의 사촌누이였다. 경종이 죽은 당시, 경종과 천추태후의 자식인 목종은 두 살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태조의 손자이자 경종의 사촌형제이며 태후의 오빠인 성종이 왕이 된 것이다.
김치양의 귀양으로 스캔들이 종료되는가 싶었지만, 성종이 죽고 목종이 왕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997년에 목종의 등극과 함께 사실상의 여왕이 된 천추태후(당시 34세)는 김치양을 정부로 불러들였다. 이로써 두 사람의 관계는 정국의 핫이슈로 부각되었다.
김치양이 처음에 받은 관직은 정7품이었다. 이때까지도 그의 정치적 위상이 매우 낮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불과 몇 년 뒤 김치양의 관직은 정2품으로 수직 상승했다. 그는 상서도성 우복야(정2품) 겸 삼사사(三司使, 정3품)가 되었다. 이 같은 초고속 승진은 전적으로 천추태후의 작품이었다.
고려시대에는 국정을 심의하는 중서문하성이 국정 집행을 감독하는 상서도성(상서성)보다 위에 있었다. 김치양이 받은 우복야란 관직은 상서도성의 차관이었다. 상서도성이 국정 집행을 감독했다고 해서 이 기구가 구체적 행정사무를 집행한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행정사무는 상서도성 하부에 있는 6부의 소관 사항이었다. 한편 삼사사는 재정이나 회계를 담당한 삼사라는 관청의 차관이었다.
국정 농단한 김치양, '그 이상의 것'을 꿈꾸다우복야 및 삼사사는 품계는 높지만 어디까지나 차관이었다. 따라서 행정부 전체나 특정 관청을 책임질 위치에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고려 정부의 권력은 김치양의 손아귀에 집중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최고권력이 천추태후-김치양 커플에게 집중됐지만, 그런 최고권력을 구체적으로 행사한 것은 김치양이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정부의 인사권도 김치양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 점을 이용해서 그는 친척이나 측근을 정부 요직에 앉혔다. <고려사>에서는 "모든 관료의 임명과 해임이 그(김치양)의 수중에 달려 있었다"고 말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이 시기에는 국무총리도 대통령 비서실장도 허수아비였다. 국정을 심의하는 권력이 중서문하성에서 나오지 않고, 국정 집행을 감독하는 권력이 상서도성에서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김치양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사적 모임이 사실상의 정부 기능을 수행한 것이다.
한마디로 이 시기는 합법적 권한을 갖지 못한 김치양이 국정을 농단하는 시대였다. 김치양이 정2품의 관직을 갖고 있었다고는 해도 그가 국정을 운영할 권한은 없었으므로 그의 국정 운영은 불법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김치양은 이 정도 선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그 이상의 것을 꿈꾸었다. 왕의 아버지가 되는 것까지 꿈꾸었던 것이다. 그런 꿈을 꿀 수 있었던 것은 그와 천추태후 사이에서 생명이 잉태됐기 때문이다.
태후의 몸에서 자기 아이가 태어나자, 김치양은 그 아이를 차기 임금으로 만들고 싶었다. 목종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야망이 가능했던 것이다. 당시 태조 왕건의 손자인 왕순이 유력한 후계자였지만, 김치양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김치양은 몇 차례나 자객을 보내 왕순을 죽이려 했다. 왕순을 죽인 뒤에 자기 아이를 후계자로 만들려 한 것이다.
사랑과 정치를 구분하지 못한 '여왕'의 최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