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리역
송성영
열차를 타기 위해 한참을 헤매야 한다는 사전 정보에 따라 한 시간 정도의 여유를 갖고 델리 역으로 향했다. 델리 역에 도착하자마자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열차표에 적힌 번호에 따라 플랫폼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열차 칸을 찾는 것이 문제였다. 열차는 보통 1, 2, 3등 칸으로 나눠져 있다. 외국인 여행자들은 주로 1, 2등 칸을 이용하는데 1 등급은 에어컨이 나오는 3A, 2A, 1A로 표시되어 있고 내가 이용할 열차 칸인 SL(Sleeper Class)은 에어컨이 나오지 않는 2등급이라 할 수 있다.
가격이 저렴한 3등 칸은 인도 현지인들이 주로 이용한다. 3등 칸을 이용할 현지인들이 길게 줄어 서 있었다. 중간에 새치기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 경찰인지 역 관리인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제복을 입은 사내들이 손에 들려 있는 작대기로 새치기 하는 사람들을 여지없이 후려치며 질서 유지에 나서고 있다.
기차타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나는 짐짓 여유를 부렸다. 기차표에 적혀 있는 번호를 머릿속에 몇 번이고 숙지해 가며 어슬렁어슬렁 열차 칸을 찾아 나섰다. 길게 이어져 있는 열차는 어림잡아 백오십 미터는 넘어 보였다. 열차칸이 보이지 않아 결국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아무리 찾아 봐도 기차표에 적혀 있는 열차 칸 번호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삼십 분쯤을 헤매고 다니다가 인도 현지인들이나 열차 관리인들에게 "영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물어가며 기차표를 내밀어 보였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앞으로 가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뒤쪽으로 가보라 한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 종합적인 판단을 내려 기차표 번호와 맞다 싶은 열차 칸으로 올라탔다.
열차 안으로 들어서자 인도 현지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고성이 오가며 좌석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싶은 생각과 함께 사람들 사이를 비좁고 들어가 기차표에 적혀 있는 번호와 같은 좌석을 찾았다. 땀을 훔쳐가며 겨우 자리를 찾았다 싶었는데 인도 현지인 몇몇이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기차표를 내밀며 말했다.
"거기 내 자리인데요."영어를 할 줄 모르는지 내 좌석 번호에 앉아 있는 그는 딴 짓을 한다. 옆에 앉아 있던 인도 청년이 내 표를 유심히 보더니 열차 칸을 잘못 선택했다며 내려서 SL칸을 다시 찾아보라고 한다. 알고 보니 3등 칸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었다.
"어이구, 환장하건네!"배낭을 챙겨 메던 내 입에서 한국말이 저절로 튀어 나왔다. 손전화기를 열어 보니 출발 시간이 20분도 채 남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에 배낭이 꽉 끼어 빠져 나가기조차 힘든 3등 칸 열차 밖으로 겨우 빠져 나왔다. 빗방울이 제법 굵어지고 있었다.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열차 관리인에게 물어물어 올라탔는데 이번에 올라탄 열차 칸에는 내 기차표와 맞는 좌석 번호가 보이지 않는다.
"아, 죽겠구먼." 어리버리한 시골 영감 처음 타 보는 기차 놀이가 따로 없었다. 부리나케 다시 그 열차 칸에서 내려 SL칸이 있다는 앞 쪽을 향해 뛰었다. 급박한 상황이 닥치면 본성이 드러나기 마련인가 보다. 평소 여유만만하게 늘어지는 인간이 허둥대며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동안 젊은 동료들에게 의지해 별 탈 없는 여정을 보내오다가 비로소 낯선 땅 인도에 와 있다는 실감이 났다.
추레한 옷차림, 텁수룩한 수염에 봉두난발의 긴 머리, 생김새는 전혀 서두를 것 없어 보이는 내가 땀을 벌벌 흘려가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영화의 한 장면이 따로 없었다. 영화 속에서 누군가에게 쫓겨 기차를 잡아타야만 목숨을 부지할 것만 같은, 혹은 시간에 쫓겨 떠나는 애인이라도 붙잡아야 하는 허둥대는 꼴이 딱 내 모습이었다. 카메라 앵글이 나를 집중적으로 포착해 롱 테이크로 따라 붙었다면 가히 볼 만했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