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의 히트상품, 명품 다큐멘터리 <다큐 프라임>
EBS <다큐 프라임> 타이틀 갈무리
영상에 음악과 자막, 내레이션을 더해 최종 완성된 방송이 나가고, 엔딩 크레딧에 올라가는 내 이름을 보면 그동안의 피로와 스트레스를 모두 보상받는 것 같다. 하지만 이내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혹여 내가 제안한 아이디어가 채택돼 방송되는 날이면 크레딧의 이름을 보는 것보다 몇 배는 더 강력한 짜릿함을 느낀다.
조연출이 넘긴 촬영 테이프를 정리하고, 프리뷰(촬영 영상을 문서로 옮기는 작업)를 하느라 정신없는 나에게 나이 지긋한 팀장님이 다가와 물었다. 평소에 칼퇴근 하는 것으로 유명해 얄미워 했던 사람이다.
"너, EBS의 3대 히트 상품이 뭔 줄 알아?"
"3대 히트 상품이요?"
"그래, 3대 히트 상품. EBS를 먹여 살리는."EBS의 히트 상품이라. 수능 방송? 다큐 프라임? 뜬금없는 질문에 당황했지만, 별생각 없이 EBS에서 잘 나가는 프로그램 몇 개를 이야기했다.
"<다큐 프라임>, <지식채널e>랑, <스페이스 공감>이요?"
"틀렸어. 가장 중요한 마지막이."
"아, 교육방송이니까 수능 방송?""아니."
"그럼요?"팀장님은 전에 없던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방귀대장 뿡뿡이." "풉" 하고 웃음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웃기려고 한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표정은 세상 최고로 진지했다. 나는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프리뷰를 준비하는데, 그는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방귀대장 뿡뿡이>가 EBS 최고 히트 상품일진 몰라도, 그걸 만드는 건 니들이야. 니들이 여길 먹여 살리는 거라고. 고생 많다. 고마워."뒤통수를 세게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나도, 피곤에 절어있는 조연출도. 오늘도 변함없이 제 시간에 맞춰 칼퇴근하는 뒷모습이 웬일인지 얄미워 보이지 않았다. 방송을 잘 모르는 막내 작가와 조연출을 상대로 종종 하는 이야기인지 몰라도, 울림이 있는 한마디였다. 팀장이라는 자리에 오르기까지, 지금의 나보다 더 치열하게 현장을 뛰어다니고 밤새 고민을 했을 사람이다.
람보르기니도 타고 바지선도 타고EBS의 히트 상품인 <다큐 프라임>에서 내가 얻은 것은 사람 말고도 여러 가지다. 평생을 살면서 '이런 곳에 가볼 수 있을까?' 혹은 '이런 일을 해볼 수 있을까?' 하는 것들을 경험한 것이다. 그것은 방송 작가를 하면서 얻은 큰 즐거움이기도 하다.
김진혁 피디와 함께 했던 <원더풀 사이언스>의 '슈퍼카의 비밀' 편에서는 람보르기니의 '가야르도'와 '무르시엘라고', 포르셰의 '911터보' 시리즈 같은 슈퍼카에 직접 올라보기도 했다. 세련된 디자인과 폭발적 배기음을 갖춘 슈퍼카의 최고 무기는 짜릿한 스피드다. 그렇게 슈퍼카의 가치를 직접 체험하는 대신, 폭설이 내린 한 겨울에 자동차가 달릴 도로를 찾고, 주인들을 수소문해 일일이 설득해야 하는 것도 나의 몫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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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프라임>에서 나와 가장 많은 프로그램을 함께 했던 연출은 피디 'Y' 다. 그는 피디라기보다는 학자 이미지에 더 가까웠는데, 자기만의 방식으로 멋진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아이템을 꾸준히 연구하고, 영상에 직접 더빙을 얹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무뚝뚝 한 듯하면서도, 씨익 웃는 모습은 피디 Y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는 조연출과 막내 작가에게 많은 일을 믿고 맡기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당시 담당 조연출 손한성 피디(지금은 예능 토크 프로그램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바다 한 가운데 떠 있는 석유 시추선인 두성호 위에서 살다시피했다. 좋은 영상을 담기 위해 거가대교와 이순신대교 구조물 꼭대기까지 오르는 등 그동안 찾지 않은 다리가 없다.
덕분에 나도 바지선을 타고 바다에 나가 거대한 케이슨 (수중 구조물이나 기초를 구축하기 위해 수상에 만들어진 중공 형태의 구조물)에 쏟아지는 몇 톤의 수력 발전 영상을 취재했다. 게다가 팀의 가장 막내인 내가, 진지한 표정으로 인터뷰하는 각 기관의 대표 수장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야 했다.
담당 PD의 충격적인 죽음그렇게 몇 편의 다큐멘터리를 더 마치고, 나는 SBS 프로그램으로 옮겼다.
막내 작가와 조연출 놀리기를 무척 좋아했던 피디 Y는 나의 손을 꼭 잡으면서 다독여 주었다.
"이놈아, 거기 가서 사고 치지 마라." 그가 나에게 건넬 수 있는 최고의 표현이라는 것을 잘 안다. 정말 고마웠다. 물론 씨익 웃는 트레이드 마크도 빼놓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뒤에 들려온 피디 Y의 사망 소식. 그의 죽음 앞에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 놀라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피디 Y의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지병의 악화다. 하지만 노조는 그의 죽음이 열악한 노동 환경과 살인적인 업무 강도 때문이라고 반발했다. 실제로 2009년 겨울부터 사교육비 감소를 목표로 한 학교 교육 본부 등 새로운 분야가 생겨나 업무량이 증가했다고 한다. 당연히 평일 야근과 주말 근무가 늘어났다. 언제나 그랬듯 피디 Y의 죽음은 사람들에게 점점 잊히고, 더는 그와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가 없었다.
그해 겨울, 1인 밴드 '달빛요정 역전만루홈런' 이진원씨가 뇌출혈로 쓰러져 끝내 사망했다. 다음해 겨울에는 <안녕, 프란체스카>와 <느낌표>를 집필한 신정구 작가가 시트콤을 준비하던 중에 간경화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들의 작품은 대단했을지 몰라도, 그들의 삶은 그렇게 처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