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의 미학 <지식채널e>
방송의 프리뷰 자료를 파일에 끼워서 정리하고 있는데 누군가 와서 묻는다. 인상이 살짝 펴지긴 했지만 여전히 무뚝뚝한 그 남자다.
"저녁 먹었어요? 밥 먹으러 갈래요?""네."누구나의 첫 출근이 그렇듯, 의욕이 넘쳤던 나는 저녁도 먹지 못한 채 일을 하고 있었다.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생긴 것이 반갑기도 해서 피디인지, 작가 선배인지, 엔지니어인지 모를 그 남자를 따라 나섰다. 오므라이스를 파는 식당. 처음 만난 두 남자의 어색한 저녁 식사 자리다. 그래도 마주 보고 같이 밥을 먹게 될 사이인데, 두 사람은 별로 말이 없었다. 대화를 억지로 이어나가는 것이 불편하기도 했고, 그래야 할 필요성도 딱히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EBS 프로그램 많이 봐요?""네.""어떤 프로그램?""네"라고 대답은 했지만 사실 EBS 프로그램을 즐겨보는 20대 시청자는 많지 않다. 나 역시도 그랬고, 당시 EBS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다큐 프라임>, <스페이스 공감>, <지식채널e> 정도였다. 그래도 <지식채널e>는 평소에 자주 챙겨봤고 많은 곳에서 교육 자료로 쓰이고 있으니, 아는 척 하기 딱 좋은 프로그램이었다. 막내 작가로서, 나의 일자리에 대해 제법 알고 있고, 열심히 공부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지식채널e>, 아시죠?"<지식채널e>요. 아시죠? 스타일 죽이잖아요. 구구절절 설명 안 해도 메시지는 확실하고, 자막 화면도 좋고. 음악도 세련되고.""그래요?"
"근데 그 <지식채널e> 담당 피디, 한국피디대상 작품상도 타고 상이란 상은 다 받았는데, 인사 발령 나서 부서 옮겼다는데요?""아... 그게 나야. 밥 맛있다. 그치?"이름은 알고 얼굴을 몰랐던 <지식채널e>의 연출, 김진혁 피디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가 맛있다는 오므라이스. 나는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민망했다. 그러나 그 후 늦은 저녁마다 그와 둘이서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던 매 순간이 나에게는 일종의 동기 부여이자 최고의 즐거움이었음을 고백한다.
프로그램 <지식채널e>는 꽤 유명하다. EBS가 어디에 있고 어떤 일을 하는지는 잘 몰라도 <지식채널e>를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5분 분량의 프로그램 한 편이 방송국 전체의 이미지를 어떻게 바꿨는지 잘 보라. 기존 EBS 방송이 갖고 있던 핵심 키워드가 '교육'이었다면 <지식채널e>는 그것을 '지식'이라는 세련된 이미지로 만들었다. 50분짜리 <다큐 프라임>을 짧게 줄여서 전달하자는 기획 의도에서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수차례의 시행착오와 진화를 거쳐 이제는 대한민국 방송의 최고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지식채널e>에는 시선을 잡아끄는 독특한 영상과 구성 기법이 있고, 현란한 화면 효과와 움직이는 자막이 있다. 거기에 쉴 틈 없이 강렬하게 쏟아져 나오는 배경 음악은 프로그램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지식채널e>는 김진혁 피디와 제작진들이 할 수 있는 100%의 노력과 재능이 담겨 있다.
5분의 미학 <지식채널e>로 세상과 소통하다그가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재미'와 '이야기'다. 실제로 김진혁 피디는 수다스럽지 않지만, 굉장히 유머러스하다.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이야기의 핵심을 짚어내는 섬세함이 있고,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이끌어가는 리더십이 있다. <지식채널e>는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을 제작해도 그 방송을 보고 이야기하는 시청자들이 적었던 EBS의 한계를 가능성으로 바꾸어 놓았다. '정말' 좋은 프로그램은 아무리 꽁꽁 숨어있어도, 기어이 찾아내서 보고야 만다는 것을 증명했다.
사실 <지식채널e>의 가장 강력한 힘은 '이야기'에서 나온다. <지식채널e>의 이야기에는 새로운 정보가 있고, 획기적인 사고가 있으며 대중의 공감이 있다. 멀리서 보면 잔잔하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불편한 진실이 있다. 나는 그 이야기와 진실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소통해 나가기 시작했다.
'우주의 역사 150억 년을 1년으로 줄이면 인류가 역사를 만들어온 시간은 1초'이 한 문장을 포인트로 삼아 '1초'편이 완성되었고, 이후 <지식채널e>에서 핵심 문장은 메시지가 됐다. 그리고 정치, 문화, 사회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참신하고 다양한 소재를 바탕으로 명확한 주제를 전한다.
프로그램의 대중성을 견고하게 구축할 수 있었던 '박지성' 편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시청자의 공감도 많이 이끌어냈다. 사실 이미지와 영상 자료가 부족해서 자막을 화면처럼 구성해 역동적인 감정을 표현했던 것인데, 오히려 주제를 전달하는 데 있어 탁월한 효과를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