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정 스님을 모신 청허당
김종길
사실 서산대사, 즉 청허 휴정 스님의 전기를 알 수 있는 자료로는 <청허당집>에 실린 '완산 노부윤에게 올리는 글, 上完山盧府尹書(상완산노부윤서)'와 제자 평양 언기가 지은 <청허당 행장>이 있다.
앞의 글은 휴정이 50세 되던 해 당대의 명재상이었던 노수신에게 자신의 이력을 상세하게 말한 것이나 50대 이후의 일대기를 알 수 없다는 맹점을 가지고 있다. 반면 뒤의 글은 생애 전반을 다루고 있으나 지극히 간략하여 소상히 알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다.
서산대사의 지리산에서의 행적은 <완산 노부윤에게 올리는 글>에서 알 수 있다. 서산대사는 두 차례에 걸쳐 18년간 지리산에 머물렀다. 겨우 아홉 살에 어머니를 잃고 이듬해 봄날 아버지마저 잃은 스님은 15세에 남쪽을 여행하다가 지리산에서 숭인 장로를 만나 불교에 귀의하게 되고 부용 영관 스님에게 의탁하여 공부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깨달음을 얻고 삭발을 했는데, 아쉽게도 어디서 삭발을 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완산 노부윤에게 올리는 글>에서는 "부지런히 공부를 했지만 이름과 상에 얽매여 해탈의 경지에 들어가기 못하고 답답함만 더해가던 어느 날 밤, 갑자기 문자를 떠난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다. '갑자기 창밖에서 우는 두견의 소리를 들으니 눈에 가득 찬 봄 산은 모두가 고향일세'라고 오도송을 읊었다. 또 하루는 '물 길어 돌아오다 문득 고개를 돌리니 푸른 산은 무수히 흰 구름 속에 있네'라고 읊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마침내 손에 칼을 쥐고 스스로 해묵은 머리를 잘랐다. '차라리 일생을 어리석은 자가 될지언정 문자나 매만지는 법사는 되지 않으리라'라고 다짐했다"고 적고 있다.
▲서산 대사의 제자 경헌 스님의 <제월당대사집>에 서산 대사가 삭발한 곳으로 원통암이 나온다.
김종길
서산의 제자 제월당 경헌(1544~1633) 스님의 <제월당대사집> '청허대사행적'에는 "숭인 장로에 의지해서 원통암에서 삭발했다. 의숭인장로낙발우원통암(依崇印長老落髮于圓通庵)'"이라고 적혀 있다. 이로 말미암아 삭발출가한 곳이 지리산 의신에 있는 원통암으로 밝혀졌다. 그때가 21세였던 1540년으로 보인다. 서산대사의 입장에선 자신의 행적을 일일이 밝히기는 어려웠겠지만, 제자의 입장에선 스승의 행적을 정확히 기록할 수밖에 없다는 걸 염두에 둔다면 이는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
정원은 잘 갈무리되어 있었다. 처음 암자 뜰에 들어섰을 때 너무도 정갈하여 비구니 스님이 계시는 줄 알았다. 맑고 향기로운 삶을 위해 주위를 깨끗이 하는 건 수행자의 기본이지만, 원통암은 깔끔함 이상이었다.
봄이 되어 연산홍과 배꽃이 만발할 즈음이면 암자는 그야말로 화원이 되는 모양이다. 연산홍 울타리 너머에는 하얀 차꽃이 피었다. 차가 심긴 곳은 높다란 축대 끝, 찻잎을 따기에는 무리겠다. 스님은 굳이 찻잎을 따서 우려먹으려는 생각보다는 그냥 심었을 뿐이라고 했다. 서산 대사는 소나무와 국화를 심는 것은 화초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색이 곧 공임을 알리기 위해서라고 했던가.
지난해 처음 뜰 앞에 국화를 심었는데올해는 난간 밖에 또 소나무 심었다네산승이 화초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색이 바로 공임을 알리기 위해서지 - 서산대사의 시 〈소나무와 국화를 심으며(栽松菊)〉
▲어두워지자 노옹 스님이 산문까지 배웅했다.
김종길
걸림 없는 대자재, 원통무애
|
원통암은 지리산 덕평봉 아래 해발 600m 고지에 있다. <진양지>에는 옛날 의신사 일대의 31개 암자를 언급하고 있는데, 원통암은 의신사의 수많은 산내 암자 중의 하나였다. 많은 고승들이 수행했던 곳으로 관세음보살을 모신 도량이다.
원통암이 자리한 곳에는 뒤로는 덕평봉을 위시해 벽소령, 칠선봉, 영신봉 등 지리산의 주능선이 둘러싸고 있다. 앞으로는 좌우로 화개골의 산자락들이 겹겹으로 펼쳐지고, 그 끝으로 백운산이 보인다. 백운산은 섬진강 건너 전라도 광양 땅에 있지만 이곳에선 마치 지리산 연봉처럼 보인다. 암자에서 보면 섬진강으로 나뉘던 경상도와 전라도의 구분은 없어지고 하나의 산자락이 된다. 원통무애다. 내남 구분 없는 통함이다.
'원통무애(圓通無碍)'는 불교의 '십무애' 중의 하나이다. 암자 이름인 '원통(圓通)'은 '원통무애'에서 나온 말이다. <삼가귀감>을 통해 불가, 유가, 도가의 삼교융화를 원했던 서산 대사의 행적이 곧 원통이요 무애다.
청허(서산) 대사의 행적을 적은 제자 경헌(1544~1633) 스님은 전남 장흥 출신으로 15세에 장흥 천관사에서 출가하여 경․율․논을 섭렵하고 묘향산에 들어가 휴정의 문하에서 수행했다. 임진왜란 때 휴정과 함께 승군을 모집하여 평양성을 탈환한 공로로 선조가 좌영장에 명했으나 사양하고, 또 선교양종판사에 명했으나 역시 사양했다. 묘향산, 금강산, 오대산, 치악산 등에서 수행했으며 저서로는 <제월당대사집>이 있다.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