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종호 부장판사
천종호
천종호 부장판사는 1997년 부산지법 판사로 임관해 올해로 18년째 판사생활을 하고 있다. 2010년 2월 창원지법에 부임하면서 소년재판을 시작했으니 소년재판 전담판사로만 5년째다. 천 판사처럼 소년판사를 오래 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대개는 1년~2년가량 맡다가 이동한다.
소년재판은 인기가 없다. 퇴임 후에 변호사로서 전관예우의 특혜를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식이 재판에 넘겨져도 가정형편이 어려운 부모들은 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한다. 그러니 소년재판 전담판사 경력은 퇴임 후의 수입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런데 왜 그는 판사들이 꺼리는 소년재판 전담판사를 고집할까.
경남 산청이 고향인 그의 가족은 그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부산의 대표적 빈민가였던 아미동으로 이주했다. 7남매 중 4번째로 장남인 그는 단칸방에서 아홉 식구와 비좁게 살았고, 육성회비를 못 내 학교에서 쫓겨난 적도 많았다. 도시락을 싸가지 못해서 점심 때면 수돗물로 배를 채웠다. 가난과 절망의 수렁에 빠진 빈민가 아이들은 비행청소년이 될 확률이 높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에 나온 주인공 조폭 중 한 명이 실제로 그의 동네친구다. 그에게 꿈이 없었다면 그 또한 비행청소년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의 꿈은 판사였다. 극빈을 벗기 위한 꿈이었다. 하지만 가난한 부모는 등록금을 대줄 형편이 못 됐다. 가족이 다 잠든 뒤에 일어나 밤샘 공부를 하며 가난을 벗으려고 발버둥 쳤지만 대학 진학도, 판사의 꿈도 포기해야 했다. 그런데 친구의 도움으로 입학원서 접수 마감 1시간 전에 부산대 법대에 원서를 접수하며 대학생이 됐다.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휴학해야 했기에 억척 같이 공부했지만 판사의 꿈은 멀었다. 사법고시에 다섯 번 떨어지고, 여섯 번 만에 합격했다.
동기에 비해 늦깎이 판사가 된 그는 부모의 당부처럼 가난한 형제들을 돕고 싶었다. 위로 누님 세 분은 아직도 가난하고, 동생은 자신 때문에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중졸의 학력으로 가난하게 산다. 7남매 중에 대학을 나온 사람은 천 판사, 자신이 유일하다. 부모형제를 가난에서 구할 책임이 있는 그는 퇴임 이후 능력 있는 변호사가 되려고 사법연수원에서부터 술로 인맥을 쌓았다. 이대로만 하면 능력 있는 변호사가 되어 형제들의 가난을 덜어줄 수 있었다.
그런데 독실한 크리스천인 아내가 제동을 걸었다. 이렇게 살기 위해 판사가 됐냐고, 명예와 부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아내의 항의와 간청을 받아들인 그는 10년간의 노력을 수포로 돌렸다. 술을 끊고, 인맥 쌓기를 중단하자 주변에 끓던 사람들이 서서히 떠났고, 소년재판 판사의 길을 걷자 전화조차 오지 않았다. 빈민가 출신의 판사, 그는 개천에서 난 용이지만 부자들과 권력자들이 아닌 약자 편에 서야만 했다.
그는 지금 '욕망의 절정기'인 50대다. 그런데 부장판사인 그는 집 한 채 겨우 장만했다. 작년에 주택할부금을 다 갚으면서 비로소 '내 집'이 됐다. 그는 빈민가에 금의환향할 수도 없고, 부모형제를 돕는 금력의 판사도 될 수 없다. 이젠 소년범의 대부로서 살아가야 한다.
SBS <학교의 눈물>과 KBS <두드림> 등에 출연하면서 그는 소년범의 대부로 알려졌고, 이제는 비행청소년을 처벌하고 격리하는 응보주의 방식을 변화시키려고 한다. 회복적 정의사회가 되어 버려진 아이들을 안아주면 아이도 살고 사회도 산다고 호소한다. 그는 좁고 힘든 이 길을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가 이 길을 가게 된 것은 아내 때문이다. 그의 아내는 엄격한 파수꾼이다. 소년범의 아픔을 다룬 그의 첫 번째 책 <아니야, 우리가 미안하다>(우리학교)가 제법 팔렸다. 그래서 인세(3500만 원) 중의 일부로 형제를 돕고 싶었으나 아내의 반대에 부딪쳤다. 그의 아내는 "아이들의 아픔을 알리려고 쓴 책이니 우리에겐 그 돈을 사용할 권리가 없어요. 그러니 인세 중에서 1원이라도 손대면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결국 인세 전액을 '사법형그룹홈' 운영진들에게 기부했다.
소년범을 살리는 대안가정 '사법형그룹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