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이 10만인클럽 '아름다운 만남'에서 구전동화로 알려진 '뿔로살이'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10여 년 동안 중국집에서 음식 배달을 하면서 100회 이상 10만인클럽에 후원한 노성출 씨(왼쪽)가 '아름다운 만남' 세 번째 초청자로 백 소장을 추천했다.
유성호
"나를 깨우친 건 무지렁이들의 삶이요, 무지렁이들이 남긴 옛날 말이요, 춤이요, 그림이다." 백기완 선생의 사상과 철학의 알맹이는 '무지렁이'다.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그가 백범 김구, 조소앙, 함석헌, 장준하 선생 등 기라성 같은 분들과 함께 민주화 운동에 앞장설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철저한 무지렁이 정신 때문이었다. 그는 길거리에서 만난 민초들을 자기 스승이라고 내세우며, 하다못해 책이나, 연설에서도 소위 옛 철학자나 위인들의 말을 예로 들지 않았다.
"나는 아주 몰락하는 집안에서 태어났어. 할머니와 어머니가 배고프다고 칭칭 대는 나를 달래는 방법이 있었어. 삼태기에 배추꼬리를 담아 와 깎아줬지. 그런데 배추꼬리가 모자랄 만큼 겨울밤이 계속되는 거야. 눈은 내리고 배는 고픈데 밤은 깊어가지. 그럴 때면 할머니와 어머니가 나한테 옛날이야기를 해줬어. 그게 나에게는 소양이 된 거지 뭐."
그는 구전동화로 널리 알려질 만한 옛이야기를 노래와 시, 그리고 거친 욕을 버무려서 구수하게 전했다. 구전문학 그 골격은 유지한 채 시대 상황에 따라 변하듯 그의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할머니가 들려주었던 '원본'에서 조금 변한 듯했다. 기자는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갔다. 백 선생의 자서전을 참고하면서 대거리 내용을 정리했다.
[뿔로살이] 네 성깔로 살란 말이야!
"뿔로살이 이야기를 해줄게. 누렁소는 뿔로 산다, 이 말이야! 핏대로 산다, 그 말이지! 주인 놈은 낮잠만 자고 누렁소는 더워 죽겠는데 등짝을 때리면서 밭을 갈라고 하니까 코뚜레를 끊어버리고는 주인 놈을 받아버렸어. 그러니 배알이 쫙 나왔는데 그걸 뿔에 걸고는 자기가 가고 싶은 풀밭으로 간 거야.
거기가 진짜 자기 태어난 고장인거든. 바로 여기가 내가 살 곳이라고 생각하면서 먹고 잠을 자는데, 웬 놈이 와서 무쇠로 풀밭을 갈아엎어 버렸어. 그래서 그 무쇠를 먹어버렸어. 얼마 있다가 웬 놈이 풀밭에 불을 질러서 그 불을 먹어버리니 어떻게 되었겠어. 어떻게 되긴. 아주마루(영원히)로 죽질 않는 천하의 힘꾼 뿔로살이가 된 거지. 제주도의 그림꾼 강요배가 이 뿔로살이를 맨 처음 그림으로 그렸는데 참으로 세계 으뜸의 작품이지."
[달거지 이야기] 무지렁이들의 위대한 심판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왜말을 안 쓰고 우리말을 멋대로 쓴다고 매를 맞고 반장자리도 빼앗기고 돌아와 '엄마가 가서 우리 선생님 좀 때려달라'고 울자, 우리 할머니께서 들려주시던 이야기야. 이제 와서 생각하면 사람의 문학이라고 자랑하고 싶어.
옛날 저 남쪽 바다 어느 섬에 못된 벼슬아치가 내려왔어. 근데 제가 벼슬아치라고 그곳 섬사람들을 깔보고 못된 짓을 제멋대로 하는데 이루 말을 할 수가 없었대. 맛있는 도미나 전복을 잡으면 하나도 먹질 말고 다 갖다 바치라는 거야. 또 집집마다 명주를 짜 해마다 (팔벌림으로) 백 발씩 가져오라는 거야.
농사 지어야지, 살림 해야지, 고기를 잡아야지, 언제 어떻게 베를 짜겠어. 그래서 섬사람들이 웅성대자, 띠따(엄명)를 내린 거야. '그 누군들 만나질 못한다. 만나기만 하면 못된 뜻을 나누려는 것이니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하드래도 만나질 못한다'는 거야.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괴로웠겠어. 서로 만나지도 못하니. 그래서 어느 달 밝은 밤, 둘이서 풍덩실 바다에 뛰어 들었어. 거기서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으려고. 그런데 이것을 알아차린 벼슬아치가 두 젊은이를 감옥에 넣고 하는 말, '너희들 년 놈들이 법을 어겼으니 죄를 받거라, 여기서 살아야지 집엔 못 간다'는 거야.
두 젊은이 입에선 서로 짜지도 않았는데도 똑같은 말이 나왔어. 나으리, 우리들은 법을 어기고 몰래 둘이 만난 것이 아닙니다. 바다에 잠긴 달을 건지러 들어간 겁니다. '달거지' 말입니다.
그런데 그 벼슬아치가 착한 두 젊은이를 가두자, 마을 젊은이들이 다 같이 달려가 벼슬아치를 난딱 안아다가 바다에 던지며 '너를 보고 죽으라는 건 아냐. 바다에 잠긴 저 밝은 달을 건져갖고 나오라. 달을 못 건지면 어떤 일이 있어도 나오질 못해.'
허부적대던 벼슬아치가 바닷물을 꼴깍꼴깍 먹으면서, '정말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여러분들이 만나는 걸 막지도 않고 더구나 바다에 잠긴 달을 건지는 달거지를 죄라고 하질 않겠으니 한번만 살려주사이다, 한번만.' 그러더니 정신을 잃드래.
그래서 꺼내보니 아이구야, 그럴 수가. 어른인 꼴에 바닷물에 쓸리고 밀리느라 옷은 다 벗겨지고 알몸으로 달달 떨고 있더래.
기완아, 걱정 마라. 이제 네 애비가 오면 우리말 쓴다고 너를 때리던 그 나쁜 선생님을 가만 두겠냐. 난딱 안아다가 바다에 던져 버릴 거다.
네 이놈, 저 달을 건져갖고 와! 그렇지 않으면 네놈은 다시는 이 땅을 밟질 못할 것이야. 이 달거지는 바로 요즈음 해야 되질 않겠어. 거짓말만 하는 못된 것들, 남의 피와 기름만 짜먹으며 떵떵거리는 것들을 모조리 저 넓은 태평양에 던져버리고 달거지를 해오라고 해야 하질 않겠어."
백 선생은 옛이야기를 이렇게 갈무리 했다.
"이거 봐. 이런저런 이야기에 사람의 마음이 있잖아.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지만 입으로 눈으로 서로 주고받았던 이야기 말이야. 그런데 공자 왈 맹자 왈은 다 기록돼 있고, 소크라테스와 마르크스 이야기도 다 기록돼 있어. 이건 누가 기록하나? 아무도 안 해. 이 할아버지가 70년 동안 떠들고 다녀도 아무도 안 알아줘. 난 이제 곧 죽을란다. 너희들끼리 오래 살아, 이놈들아." [닫는 마당] 민중의 나침반, 시대의 파수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