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서울대교구와 서울역사박물관은 천주교 관련 근대유물 400여 점을 한자리에 전시하는 '서소문·동소문 별곡' 특별전을 8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막한다. 이번 전시회는 교회사와 시대사, 도시사, 역사지리학의 다양한 성과를 아우르며, 천주교회사 전시로는 첫 행사라고 주최 쪽은 말했다. 전시회는 서소문 별곡과 동소문 별곡의 두 가지 테마로 진행된다. 사진은 로마교황청 민속박물관이 소장 중인 '황사영백서'.
연합뉴스
"우리 정부를 압박해 주십시오"라며 교황에게 호소한 김영오씨의 편지에는 특별법 제정에 대한 절박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자국 정부를 상대로 '교황'에게 압박을 요청하는 편지를 쓴 것은 김영오씨가 처음이 아니다.
최초의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있었던 1801년에도 그와 같은 편지가 작성된 바 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황사영 백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부친이 정5품 벼슬까지 지내는 등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황사영은 16세 때 성균관 입학 자격을 주는 진사(進士)에 합격했다. 정조가 직접 그의 손목을 잡고 칭찬하면서 등용까지 약속할 정도로 장래가 촉망받는 인물이었다. 황사영은 다산 정약용의 큰형인 정약현의 딸과 결혼했다. 처삼촌 정약종(금번 선포된 124명 복자 중 한명, 정약용의 둘째형)이 들려준 천주학에 매료된 그는 결혼한 해에 천주교에 입교하게 된다.
신유박해가 발생한 1801년 2월 처삼촌들이 체포되고, 자신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게 되자 황사영은 충북 제천의 '배론'으로 피신하게 된다. 당시 배론은 박해를 피해 내려온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 지내던 곳으로, 주민들은 옹기굴을 가장한 토굴을 만들어 황사영을 숨겼다.
숨어 지내던 황사영은 1801년 8월 자신에게 세례를 준 주문모 신부 등이 이미 4월에 참수된 소식을 듣고는 격분해 조선의 천주교 박해 상황과 그에 대한 해결방안을 담은 문서를 작성한다. 어두컴컴한 토굴 속 등잔불에 의지해 길이 62㎝, 너비 38㎝의 흰 명주 위에 1만 3384자를 썼다. 그는 그 백서를 밀사를 통해 청나라에 있던 프랑스인 구베아 주교에게 보낼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의 밀사가 체포됨에 따라 백서는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황사영은 백서와 함께 체포돼 결국 '대역죄'를 선고받고 같은 해 11월에 능지처참에 처해졌다. '순교자' 황사영 역시 이번에 선포된 124명의 '복자' 대상으로 거론되었으나 마지막 순간에 제외됐다.
황사영 '백서'는 한자로 1만3000자가 넘는 방대한 분량이다. 앞부분은 1801년 전후의 박해상황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뒷부분은 이와 같은 박해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나름의 대안을 기술하고 있는데, 외국 군대를 동원해 조선 왕실을 압박하는 방안까지 상세히 나온다.
황사영은 조선은 중국 황제의 명이면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면서 "교황이 중국 황제에게 서신을 보내어 조선으로 하여금 서양 선교사를 받아들이라 하면 그리 할 것"이라며 "이것이 이른바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는 방법"이라고 백서에서 주장했다. 이 외에도 "군함 수백 척과 정예군 5,6만 명이 대포 등 무기를 싣고 조선 해안가에 와 국왕에게 천주의 사신을 받아들이라고 요청하라"는 등의 내용이 기술돼 있다.
황사영은 가톨릭이라는 종교 입장에서 보면 독실한 신앙인이자 순교자이나 비종교인 시각에서 보면 다른 해석이 가능한 논란의 인물이다. 백서에서 그는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외국 군대를 끌어들이는 방안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나아가 조선을 중국의 속국으로 편제하는 방안까지도 제시했다. 종교의 자유를 무엇보다 우선시했던 그는 27세 젊은 나이에 죽임을 당했다.
'비극'으로 끝난 213년 전 편지... 2014년 편지의 결과는 2014년과 1801년은 수치로 보이는 간극만큼이나 유사한 점을 찾기 어렵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교황을 상대로 '자국 정부를 압박해 달라'는 편지를 작성했다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2014년은 세월호 특별법이 통과되게 '압력을 행사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였고, 이 편지는 교황에게 직접 전달됐다. 1801년은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교황이 청나라 황제를 통해 '압력을 행사해 달라'는 내용이 담겨진 백서였다. 이 백서는 작성되었지만 전달되지 못했고 황서영은 대역죄인으로 죽임을 당했다.
1801년 편지의 작성 과정과 결말은 이미 역사책에 기록돼 있다. 그 당시의 결과는 비극이었다. 그러나 당시 탄압 대상이었던 천주교는 2세기가 지난 지금 순교자들을 '복자'로 선포하는 영광스러운 행사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2014년 편지의 작성과정은 뉴스를 통해 우리는 알고 있다. 그 결과는 과연 어떠할 것인가. 편지를 작성하고 교황에게 직접 전달한 김영오씨는 '(원하는 방향으로) 특별법이 제정되지 않으면 광화문에서 죽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8월 17일, 그는 35일째 단식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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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에게 "정부 압박해달라" 213년 전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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