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중국대한민국대사관 정문중국 대사로 중국 통보다는 정치 인물이 선호됐다
조창완
그렇다면 수교 20년을 넘긴 우리의 중국 대사 파견은 어땠을까. 1992년 8월 24일 한국과 중국은 역사상 첫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지속적으로 관계를 가져오던 대만과의 국교를 단절하면서 취한 조치였다. 대만에서 공부하던 많은 이들은 배신감에 분노한 대만인들의 폭행까지 몸으로 받으면서 역사의 변화를 직면해야 했다.
한중 국교수립이 된 지 약 2주 뒤인 9월 7일 노재원 대사가 취임했다. 1932년 생인 노 전 대사는 서울대 법대 출신이지만 외무 관료로 시작한 전형적인 외교전문가였다. 외교안보연구원장(1981)과 외무부 차관(1982~84) 등을 역임했고, 주 캐나다 대사(1984~88)를 거친 후 초대 중국대사를 맡았다. 그는 1992년 8월 주중 임시 대사 대리로 부임해, 수교가 이뤄지지까지 실무 작업을 지휘했다. 또한 훗날 주중대사를 지내는 김하중·신정승 등의 실무자들도 노 전 대사를 도왔다.
1993년 6월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황병태 의원이 주중대사로 취임했다. 황 전 대사는 그때까지 경제기획원 경제협력국장을 역임하고 한국외대 총장과 통일민주당 부총재를 지내는 등 관계·학계·정계를 넘나드는 스타일의 정치인으로 외교나 중국과는 큰 관계가 없었다.
당연히 취임 당시에는 걱정이 될 수밖에.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황 전 대사는 취임 이후 끊임없이 중국을 연구하고, 부딪히면서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했다. 특히 부임 당시까지 중국어를 하지 못했는데 나중에는 상당한 수준의 중국어 실력을 갖췄다. 또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경제관료를 한 경험으로 인민대회당에서 중국 부장(장관)들에게 특강을 해 보폭을 넓히기도 했다.
그는 1996년 2월에 이임했는데, 장쩌민 주석이 환송연까지 열어주면서 평생 중국에 방문할 수 있는 지위까지 얻었다. 또 황 전 대사의 취임기는 한국 기업이 중국에 자리할 기틀을 다지는 작업을 하는 때여서 그의 역할이 중요했다.
김영삼 정부의 남은 시기를 중국서 보낸 대사는 정종욱 전 대사다. 1940년생인 정 전 대사는 외교학과 출신으로 하와이대와 예일대에서 중국 정치를 공부했으며, <신중국론>이나 <마오이즘>에 관한 책을 펴냈다.
정 전 대사는 정권이 바뀌면서 교체돼 큰 역할을 할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귀임 후 정 전 대사는 아주대 석좌교수 등을 역임하면서 중국에 관한 우리의 관점을 설파하는 데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또 중국이 안정적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정치 체계를 바꾸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설파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난 뒤 1998년 4월 권병현씨가 대사로 취임했다. 당시는 한국이 IMF 관리상태로 들어서서 위기감이 고조된 시기였다. 그는 2000년 8월까지 2년 반여 동안 대사로 재직했다. 권 전 대사의 뒤를 이은 사람은 홍순영 대사다. 2000년 8월 말에 취임한 홍 전 대사는 전형적인 외교관 출신이다. 외무부 북미과정, 아프리카 국장을 거쳐서 제2대 외교통상부 장관(1998~2000)을 지낸 그는 무게로 따지면 중량급 인사였다. 이후 홍 전 대사는 통일부장관으로 옮겨갈 때까지 1년 조금 넘는 시간을 주중대사로 근무했다.
홍 전 대사의 뒤를 이어 2001년 10월 김하중 제6대 대사가 신임장을 받았다. 취임 전까지 차관급인 대통령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을 지냈고, 한중 국교 정상화의 실무진, 서울대 중문과 출신의 중국어가 가능한 외교관이라는 점에서 첫 중국통 대사 시대를 연 셈이다.
그런 인연인지 김 전 대사는 무려 7년 2개월을 장기집권하는 특이한 경우가 됐다. 김 전 대사는 중국통 답게 2002년 중국과 2003년 한국에서 <떠오르는 용, 중국>(騰飛的龍)을 출간하기도 했다. 김 전 대사가 오래 동안 재직한 데는 중국통이라는 측면도 있었지만, 이해찬 총리 등과의 인연이 각별했기 때문이라는 측면과,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정부가 들어섰기 때문이라는 측면도 작용했다.
김 전 대사가 떠나고 반년의 공백이 지난 후인 2008년 5월, 신정승 제7대 주중 대사가 신임장을 받았다. 신 전 대사는 주 뉴질랜드 대사관 대사, 외교통상부 본부대사 등을 지낸 전형적인 외교관 출신 인사다.
그는 1998년 12월부터 2002년 7월까지 주중국대사관 공사를 지냈기 때문에 중국과 전혀 인연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캐나다 대사를 지내다가 초대 중국대사로 취임한 노재원씨와 경력이 비슷했지만 노재원씨가 외무부 차관을 지냈다는 점을 감안하면 비중에서는 휠씬 가벼웠다.
혹자는 차관이라고 했고, 혹자는 차관보급으로도 평가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중국을 통하는 문제 등에서 불협화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중국은 대북 문제에서도 중요한 창구였지만 중국과 말이 통하는 부분이 거의 없었다.
또 6자회담 등에서 한국이 소외됐다. 그런 가운데 중국 정부도 자국의 말이 통할 수 있는 중량급 인사를 원한다는 목청이 커졌고, 서서히 우리 대외관계에서 중국의 비중을 자각한 정부는 중량급 인사의 파견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이런 요구로 이명박 정부는 청와대 비서실장 출신의 류우익을 보냈고, 박근혜 정부도 정치적 비중이 높은 권영세 대사를 보냈다. 다만 이런 대사들은 중국을 잘 알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중국의 외교적 위세가 커가면서 큰 역할을 못하는 것도 있다.
그럼 중국이 보내는 한국 대사는 어땠을까. 한국에 부임한 주한 중국 대사들도 한국어에 익숙한 이들이 많았다. 장팅옌 초대대사를 비롯해 리빈, 닝푸쿠이 등이 한국어에 능숙했다. 청융화 대사나 2대 우다웨이 대사는 한국어보다는 일본어에 익숙했다. 사실 중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한국어에 익숙한 대사들보다는 익숙하지 않은 대사 때가 별 잡음이 없이 잘 넘어갔다는 점에서 한국어가 필수요소는 아니다.
또 정적인 관계를 중시하는 우리나라의 문화상 한국어의 구사가 가능할 때는 문제의 소지가 있기에 한국어를 못하는 대사를 점차 더 선호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이 때문인지 장씬썬, 추궈홍 등 전직과 현직 대사들은 모두 한국어를 하지 못했다. 반면에 전직 천하이(陳海)나 현직 하오샤오페이(郝晓飞) 부대사들은 모두 한국어가 능숙한 한반도통 외교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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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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