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번쩍하더니 입에서 피가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휴지를 입에 가득 물고 근처 치과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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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변기에 빠진 이빨'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서울 민통련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느냐 하면 배경 설명을 할 필요성 때문에서다. 사무실이 들어가 있는 홍제동 3층 건물은 지은 지가 오래 되었다. 따라서 1층에서 3층까지 꺾임 없는 민자 계단이 가파르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가파를 뿐만 아니라 몹시 좁아서 사람들이 양쪽으로 오르내리면 딱 맞을 폭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잡고 올라갈 수 있게 만든 손잡이도 없었다. 다리가 불편한 내가 오르내리기는 정말 어렵고 힘든 건물이었다. 오죽했으면 등산을 하는 각오로 임했다고 하였을까. 늘 조마조마했다. 여차하면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그런 날이 오고야 말았다. 그 가파른 계단을 청소할 때였다. 3층에서 2층으로 내려가면서 밀대로 계단을 청소하다가 미끄러지고 말았다. 머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본능으로 앞쪽으로 돌려 손으로 계단을 잡는다는 것이 이빨 부분을 모서리에 부딪치고 말았다.
불이 번쩍하더니 입에서 피가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휴지를 입에 가득 물고 근처 치과를 찾았다. 위 이빨 중간 부분 두 개가 뿌리만 남고 부러져 나갔다고 했다. 젊은 사람이 참으로 황당한 일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 치과에 다니며 얼마간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부러진 이빨을 해 넣어야 했다.
하지만 운동권 단체 실무자로 상근하는 입장에서 돈이 있을 리 만무했다. 두 개의 치아를 해 넣는 데는 적지 않은 돈이 필요했다. 본 이빨과 너무 확연히 차이 나는 누런색의 가치(假齒)를 붙이고 근 1년을 지내야만 했다.
우연한 기회에 한 후배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치대를 나와 그 당시 육군 의무병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나의 사정을 잘 아는 그가 치과를 하는 그의 친구를 소개해 주었다. 돈을 받지 않고 이빨을 해 달라고 특별 부탁을 해 주었다. 홍대 입구 높은 건물 5층에 치과를 하는 그 후배의 친구는 친형을 대하듯 정성스럽게 치료를 해 주었고 본 치아와 거의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예쁜 이빨 두 개를 가지런히 제 자리에 붙여 주었다.
웃을 때나 말을 할 때 이젠 손으로 입을 가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이빨 모형을 떠 조금 남아있는 뿌리에 갖다 붙인 것이기 때문에 언제 떨어질지 모를 위험성이 있었다. 딱딱하고 질긴 음식을 피하라고 의사가 신신당부를 했기 때문에 그것이 늘 뇌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 말이 마음의 짐이 되어 소화까지 잘 안 될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날 딱딱한 음식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해 넣은 이빨이 떨어지고 말았다. 지금만 같아도 치과로 달려가 떨어진 이빨을 다시 붙였을 터인데 그 때는 매사에 여유가 없어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떨어진 이빨을 틀니처럼 끼고 덜렁덜렁거리는 상태로 생활을 했으니,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처량하고 미련한 이로 보였겠는가.
변기에 대고 토하는데... 이빨 두 개가 사라졌다이런 치아 상태에서 다시 이야기는 종로 2가 그 갈비집으로 돌아간다. 우리의 시국 성토는 그 강도를 더해 갔다. 노태우가 집권하고도 변한 것이 없다고 목청을 높였다. 노동 탄압과 학원 사찰 등 군사 독재의 잔재는 여전하다며 정부를 비판했다. 남북관계도 냉각 국면이 풀리는 것 같더니 제자리걸음이라고 아쉬움을 표시했다. 젊은이들의 분신 정국을 끝내기 위해서는 문민 정권이 빨리 들어서는 길밖에 없다고도 했다.
막걸리가 몇 순배 돌고 안주도 동이 날 즈음 속이 울렁거려 화장실을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빈 속에 들이켠 막걸리가 속에서 이상증세를 보인 것이다. 걸터앉아 편히 용변을 보는 좌변기가 많지 않던 시절, 그 음식점의 화장실은 쪼그리고 앉아서 볼일을 보는 변기였다.
술을 곁들여 파는 음식점의 화장실 상태는 더럽기가 한량없었다. 나는 그곳에 대고 속에 있는 것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미처 다 씹히지 않은 돼지고기며 밥알에 김치 조각 등 그날 먹은 것들이 고스란히 토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