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역 화장실. 해우소란 간판을 단 화장실이 이색적이다.
이정근
'과민성대장증후군'을 친구삼아 동반자로 살아가는 동안 사건 사고도 많았지만 내 생애 있어서 가장 극적이고 지저분하고 드라마틱한 사건은 화장실 습격사건이다.
서울시내에서 도보로 이동할 때, 급한 볼일이 있으면 경비원이나 수위 아저씨의 눈치가 보이지만 주변 건물로 뛰어 들어가거나 지하역사로 들어가면 된다. 우리나라는 화장실 선진국이라지 않은가. 지하철 역사에 있는 화장실은 깨끗하고 쾌적하다. 하지만 핸들을 잡고 운전을 할 때는 사정이 달라진다. 도로에 차를 세워놓고 들어가기도 그렇고, 주차장을 찾아 차를 주차해놓고 화장실을 찾아가기에는 시간이 촉박하다. 때문에 4대문 안에서 운전하려면 '네비'에 나와 있지 않은 화장실을 머릿속에 입력해두어야 한다.
차를 운전하는 사람에겐 주유소가 딱이다. 주차하기 편리하고 곧바로 화장실로 직행할 수 있다. 지금이야 지형지물이 많이 변했지만 내가 한창 운전할 때는 4대문 안에 주유소가 몇 개 있었다. 종로 3가 세운상가 건너편과 경희궁 서울역사박물관 근처에 주유소가 있었다. 을지로에는 5가 국립의료원 건너편에 그리고 퇴계로에는 대한극장 옆과 명동역 근처에 있었다. 있는 자리에서 주유소가 여의치 않으면 남산으로 올라붙어 식물원 앞이나 창경궁 앞 서울대학병원 담 옆으로 차를 몰았다.
청량리에서 마포 가는 길. 신설동을 통과했는데 뱃속에서 이상한 신호가 왔다. 예사롭지 않은 신호다. 감으로 보아 3분을 넘기지 말라는 메시지다. 즉시 '네비'를 가동시켰다. 세운상가 건너편 종묘 입구에 주유소가 있다. 교통 흐름을 보면서 시계를 작동시켜보았다. 아무리 빨리 가도 5분 이상 코스다. 동대문에서 우회전하여 창경궁 앞으로 가는 길도 만만치 않다. 숭인동 사거리를 통과했는데 위급신호가 전해온다. 1분내 결정하라는 다급한 신호다. 즉각 비상 '네비'를 작동시켰다. 동대문 옆 서울성곽 언저리에 공중화장실이 포착되었다.
헌데, 버스와 승용차 할 것 없이 교통량이 많은 간선도로다. 어디에다 차를 세워 놓은 단 말인가? 그때는 성곽을 따라 낙산으로 올라가는 길도 없었다. 생각만 해도 아득하다. 하지만 뱃속에서는 계속 SOS를 보내오지 않은가. 할 수 없이 길가에 차를 붙였다. 문도 잠그지 못하고 뛰어갔다. 아뿔싸. 다리를 오므리고 천천히 걸어가야 하는데 뛰어가니까 싸기 직전에 다달았다. 위기일발이다.
화장실에 도착했다. 남자용 1칸 여자용 한 칸이다. 남자용 문을 두들겼다. '똑똑' 안에서 응답이 왔다. 염치불구하고 여자용 앞에 섰다. '똑똑' 노크를 보냈다. 안에서 답이 왔다. 있다는 것이다. 다시 남자용 앞으로 돌아왔다. 다리가 꼬인다. 10초가 10분 같다. 30초나 흘렀을까? 다시 노크를 했다. 답이 왔다. 또 노크를 했다.
"왜 그래요?" 짜증 섞인 목소리가 화장실 문을 넘어왔다.
"저어, 죄송하지만 제가 급해서 그런데 잠시 교대하면 안 될까요?" 급한 거만 해결하면 금방 비워 줄테니 잠시만 교대하자고 제안했다.
"나도 금방 들어왔어요." 까칠한 목소리다. 절망이다.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차를 길가에 세워놓고 여기까지 왔는데 바지에 싸란 말인가?
'크 크 크으'다급한데 옆 칸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젊은 처자의 목소리였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느라 목안으로 기어들어가는 소리다. 덮개가 터져있으니 소리가 다 들릴 수밖에 없다.
"저, 정말 죄송한데요. 합승하면 안 될까요?"예전에 이용해봤던 기억으로는 이곳 화장실은 푸세식이다. 다행스럽게도 변이 내려가는 구멍이 판자 사이에 직사각형으로 뚫려 있는데 다른 곳보다 길었다.
"뭐라구요?"사내 목소리와 동시에 옆 칸 여자용 화장실에서 '빵' 터졌다.
"훗 훗 후윽."웃느라 볼일을 못보고 있는 처자의 모습이 그려졌다. 문을 열어젖히고 쥐어박아 주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다. 여자가 들어있는 화장실을 강제로 열고 들어가면 '주실 침입 및 강제추행 예비음모죄'에 걸리지 말란 법이 없다.
"같이 싸자구요.""같이요?" 어이없다는 소리와 함께 걸쇠가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 그야말로 우주의 평화를 알리는 소리와도 같았다.
"고맙습니다." 체면을 따질 계제가 아니다. 화장실 문을 밀치고 들어간 나는 염치불구하고 바지를 내렸다.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있던 사내가 앉은걸음으로 앞으로 이동한다. 그 사내와 등을 맞대고 앉았다.
"나 원, 세상을 살다보니까 별일이 있구만..." 그 사내의 입속에서 푸념이 흘러나왔다. 그 사내가 뭐라 하건 말건 '푸데데덱!' 1발 발사다. 배설을 하고나니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이제 살 것 같다. 하지만 시원도 잠시. 이때부터 미안한 생각이 들고 길거리에 세워둔 차 걱정에 더 이상 앉아있을 수가 없다.
"저 먼저 일어날게요.""당신 맘대로 하슈." 일어나서 바지를 올렸다. 앉은 자리에서 뒷걸음으로 자리를 이동하던 사내가 고개를 돌려 힐끗 쳐다본다.
"합승했으면 합승요금이나 내시오."사내가 빙그레 웃는다.
"내라면 내지요."나도 웃었다. 화장실에서 싱긋 웃어준 그 사내. 어디서 살고 있는지 한 번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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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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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기 하나로 둘이... 내 생애 최악의 화장실 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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