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30일 오후 경기 안산시 화랑유원지에 마련된 '세월호 사고 희생자 정부 합동분향소'를 찾은 시민들이 조문한 뒤 안타까워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가난하거나 권력이 없는, 나이나 적거나 많은 이들이 오히려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된다. 대중교통수단인 철도와 지하철의 경우도 그렇다. '이윤논리'를 앞세워 차량 정비 비용을 줄이고, 안전업무 담당 인력을 줄여서 위험을 높이고 있다. 스스로 사고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이들은 큰 비극을 면하겠지만 위험으로부터 자력구제를 하기 어려운 약자들은 타인의 선의에 의존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안전 비용을 제대로 지출하지 않는 것 자체가 이미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폭력이다. 참사 이후 과정에서도 피해자들은 배제되고 책임은 하위직들만 진다. 정부는 사회적으로 여론이 집중될 때 책임자를 수사하고 처벌하는 척만 한다. 하지만 여론의 관심이 멀어지면 책임자들에 대한 문책은 사라지고 재발방지 대책도 유야무야되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최고책임자와 정책결정단위의 고위 공무원들이 책임지도록 하지 않는 이상 기업의 이윤을 위해 안전비용을 줄이는 일은 계속될 것이다. 또 정부와 기업이 결탁하여 안전관리와 재난구호를 소홀히 하는 일 역시 반복될 수밖에 없다.
참사가 '불평등하다'는 말은 참사가 결코 일반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진실을 규명하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곡기를 끊고 싸우는 유가족들에게 누군가는 폄훼하는 말조차 서슴지 않는다. "사고는 언제라도 벌어질 수 있는데 그 모든 사고에 특별법을 만들어야 하냐"고. 게다가 새누리당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세월호 참사는 '해상교통사고'일 뿐이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사고는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다. 복잡하고 속도가 빠른 현대사회에서 사고는 일상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고가 '참사'가 되는 것은 결코 일상적이지 않다. 일반적으로 사고는 수습도 금방되고 큰 피해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사회구조가 생명을 우습게 여기고, 안전에 대한 비용을 아끼려 들며, 무책임이 구조화되면 사고는 '참사'가 된다.
2004년 홍콩에서도 한 노인의 방화사건이 있었지만 사망자는 한 명도 없었고 부상자만 14명이었다. 지하철 내부에 불연재를 사용했고 사람들을 신속하게 대피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03년에 있었던 대구지하철 참사에서는 192명의 사망자와 21명의 실종자, 그리고 151명의 부상자를 남겼다. 기관사는 마스터키를 빼고 혼자 도망갔고 구조를 담당할 승무원은 턱없이 부족했으며, 지하철 재료들이 모두 불쏘시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세월호가 사고가 아니라 '참사'인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