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한 심정에 떨군 고개지난해 11월 27일 경기도 평택시 칠괴동 쌍용차 공장 정문 앞에서 정부와 사측의 부당한 손해배상청구소송 철회를 촉구하는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기자회견 도중 한 해고자가 고개를 떨구고 있다.
이희훈
티코가 달리는 길에 벤츠가 돌연 뛰어들었다. 티코는 피하지 못하고 벤츠를 들이받았고, 티코도 박살이 났다. 수리비는 벤츠가 1억 원, 티코가 100만 원이 나왔다. 벤츠의 과실이 훨씬 컸지만 티코가 벤츠에게 몇 천만 원을 물어주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공평하다고 사람들은 느낄까?여기서 벤츠는 대기업을, 티코는 노동조합을 빗댄 표현이다. 어느 현직 판사가 자동차 사고에 비유하여 대기업 노사의 손해배상의 형평성을 제기해 눈길을 끈다. 이 판사는 파업 손해배상액이 너무 과다하다며 법원이 노조의 민사책임을 큰 폭으로 제한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도진기 판사 "벤츠는 지갑 열면 그만이지만, 티코는 파산" 인천지법 도진기 부장판사는 지난 10일 법원내부전산망 '코트넷'에 <노동조합과 손해배상>이라는 글을 통해 현행 법리 체계 안에서 파업손배소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해 눈길을 끈다.
도 판사는 벤츠와 티코의 자동차사고를 예로 들며 "비슷한 상황이 거대 기업과 노조 간에 벌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기업의 불법 행위 vs. 노조의 불법 파업'의 경우, 생산라인의 정지로 손해가 발생하였다고 하여 그대로 배상액으로 떠안긴다면 형평성의 문제가 발생한다"며 "기업은 불법이 드러나도 유유히 지갑을 열면 그만이겠지만, 노조는 파산"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불법행위에 손해배상을 명하는 건 당연하고 쟁의행위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고 전제하면서도 "문제는 불법성의 존부보다는 배상액의 크기(액수)"라고 지적했다. 도 판사는 "큰 기업일수록 생산할 수 있었던 물량 손실 뿐 아니라 고정비만 해도 엄청나 수십, 수백억에 이르기도 한다"며 "노조와 노조원들에게 액면금대로 배상을 명한다면 사실상 '끝장'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현행 대법원 판례는 자동차회사 등 제조업체 노조의 파업이 불법으로 규정되면 ▲생산손실(조업 중단으로 제품을 생산하지 못함으로써 판매로 얻을 수 있는 매출이익을 얻지 못한 손해)과 ▲고정비(조업중단의 여부와 관계없이 고정적으로 지출되는 차임, 제세공과금, 감가상각비, 보험료 등)를 손해배상의 범위로 본다. 따라서 대규모 공장 설비가 있는 대기업에서 노조가 파업을 벌이게 되면 천문학적인 손해배상 책임을 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철도노조, 현대차, 쌍용차, 한진중공업 등에선 사측이 제기한 파업손배소에서 노조가 수십억 원~1백억 원대의 배상판결을 받은 바 있다. 노동조합이나 노조원 입장에선 그야말로 살인적인 판결이 될 수밖에 없다.
도 판사는 "과연 그들이 '그만큼' 잘못했을까? 불법파업, 잘못이다, 그래서 형사처벌을 받는다, 그런데 죽기까지 해야 하는지?"라고 반문하면서 "종류는 다르지만 기업도 잘못을 한다,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이 죽어도 기업은 손해배상 때문에 문을 닫지는 않는다"고 노사의 형평성 문제를 제기했다.
대기업 노조가 '죽음에 이르는 배상'하는 이유? 그는 "대기업 노조가 '죽음에 이르는 배상'을 지게 되는 이유는, 그들의 잘못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상대방이 크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액면대로의 배상은 노조의 영구적 활동정지를 초래한다"며 "노조원들과 가족은 생계를 잃는 반면, 그 돈 받는다고 기업의 수익이 대폭 개선되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도 판사는 생산손실과 고정비 손해배상 책임에 대해 일반인이 수긍하기 어려운 점을 거론했다. "'네가 일을 안 했으니 월급 못 주겠다' 혹은 '파업하면서 물건 부쉈으니 물어내라' 여기까진 쉽게 이해가 되는데, '네가 일했더라면 내가 벌었을 돈을 못 벌었으니 그 돈 내놔라'(라는 것은) 통상의 손해와는 좀 다르다"면서 "과장이라는 비난을 감수하고 말하자면, (생산손실과 고정비손해)는 '꿈에 본 손해'의 배상으로 여겨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노조원들은 형사책임보다 민사배상에 더 몸서리치는 것 같다, 형사처벌을 감수하고 나섰던 사람도 생계의 위기 앞에서는 발이 얼어붙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티코와 벤츠의 예를 다시 들며 "벤츠 사이드미러 하나만 박아도 차를 팔아야 한다면, 티코는 어디 무서워서 달릴 수나 있을까?"라고 반문했다.
"판사, 법해석기관으로 한계 있지만 형평에 맞는 해결 도모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