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각 스님의 등신불을 모신 지우화산 육신보전신라왕자로서 중국에 들어가 자비행을 베푼 김지장 스님의 활동은 한중간에 가장 인상 깊은 인적 교류다
조창완
봄이 짙어갈 무렵 내게도 큰 슬픔이 찾아왔다. 어릴 적 무등산에서 만났던 다형 김현승의 아픔을 나도 겪었다. 우리 가족은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저지앙 푸투오산(普陀山)과 지장보살을 모시는 지우화산(九華山) 등을 다녔다. 지우화산의 지장보살은 다른 불교 명산들과 달리 관념적인 신이 아닌 김교각 스님이라는 인물과 동격이다.
신라왕자였던 김교각 스님(696~794)은 신분을 버리고, 이곳으로 와서 수많은 사람을 깨우치고, 훗날 등신불이 된 살아있는 지장보살로 추앙받고 있었다. 지우화산 어디에나 한글 안내판이 있어, 스님의 고국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지금까지 수천 년간 그리고 앞으로 수천 년이 지나도 그만큼 중국사람들의 가슴에 남을 인물이 없을 것이다.
2009년 한국의 5월은 유난히 잔인했다한국에 돌아와 한숨을 쉬고, 집 거실에 누웠는데 같이 근무했던 신문사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다며 텔레비전을 보라는 것이었다. 혼몽한 일주일이 갔다. 투표를 위해 비행기에 몸을 싣고 귀국했던 2002년의 기억 그리고 대통령의 조금 경솔했던 발언에 대한 비판하며 썼던 글의 기억 등 모든 것이 허무하게 하늘로 날아갔다. 유난히도 잔인했던 그해 5월은 그렇게 갔다.
6월 29일에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불러일으킨 전 나스닥 증권 거래소 이사장 버나드 메이도프에게 뉴욕남부 연방법원이 150년 형을 선고했다. 중국으로서는 미국 금융위기로 인한 파장이 있었지만, 경쟁자의 도태는 자신에게 기회가 된다는 원리가 있어서 위로가 되기도 했다. 우선 중국은 이 사건 등을 계기로 미국이 더이상 국제금융시장의 보안관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세계가 확인했다고 판단했다. 위안화를 국제기축통화로 부상시키는 작업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 셈이다.
여기에는 당시에도 2조 달러를 바라보는 외환보유고가 작용했다. 4월 1일 있었던 G20 정상회의에 앞서서 인민은행 총재가 달러의 기축통화 유지 능력에 대한 포문을 던졌고, 9월 중순 중국 따리엔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 연례 정상회의에서 중국은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역할을 강조했다.
세계 금융위기 1년 만에 혼란을 막게 한 힘은 중국 경제의 지속적 성장이었다는 것을 강조했고, 이를 반박하기에 쉽지 않았다. 더욱이 전해 중국 인권 문제를 거론했던 프랑스조차 중국이 떠안기는 경제협력의 메시지에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3월 티베트는 무사했지만, 이해 7월 5일에는 우루무치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지역의 원래 주인인 위구르 인들과 한족들 간의 노골적인 감정대결의 형태였다. 아랍민족에 가까운 위구르인들과 한족 간은 명확한 표시가 난다. 우루무치 상권의 분할, 종교적 차이 등이 많았는데, 이런 사건이 노골화된 것이다.
중국은 분명한 지배자였지만 위구르 인들도 아랍 민족이 뒤를 바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무조건 물러서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200명이 사망하고, 1천8백 명이 부상한 것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다시 역사속 미궁의 한 계단을 채우는 미봉책으로 마무리됐다.
그해 10월 1일은 중국이 탄생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에 톈안먼 행사는 더욱 크고 화려했다. 공식적으로 10만 명이 모인 가운데 56개 민족이 건국 60주년을 축하한다는 의미에서 56문의 대포가 60발의 예포를 발사하며 행사가 시작됐다. 이후 후진타오 주석과 장쩌민 등 전·현직 원로들은 톈안먼 망루에서 인민해방군의 열병식을 봤다. 땅에서는 대륙 간 핵탑재 탄도 미사일 등이 하늘에서는 중국 자체개발 조기경보기, 공중급유기 등이 에어쇼를 펼쳤다.
이후 후진타오가 중국기업 이치가 만든 300만 위안짜리 고급 승용차로 분열한 후 10만 명이 국민대행진을 벌였다. 오성홍기 뒤에는 중국을 건국의 아버지 마오쩌둥, 먹는 문제를 해결한 덩샤오핑, 당대를 연결한 장쩌민과 현직 주석 후진타오의 초상화가 차례대로 따라갔다. 행사 막바지에는 베이징 올림픽 폐막식보다 두 배나 많은 30만 발의 폭죽이 베이징 밤하늘에 터지며 분위기를 돋았다.
중국 역사에서 건국 60년은 결코 녹녹한 숫자가 아니다. 처음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는 16년을 채우지 못했다. 가장 가까운 왕조인 명나라나 청나라도 개국한 후 30~40년도 되지 못해 큰 위기를 맞았다. 2대 군주를 둔 치열한 형제간의 혈투가 있은 후 극복해야만 긴 왕조가 보장됐다. 중국이라고 해도 완전한 예외일 수는 없었다. 과거처럼 황제가 대를 물려, 정권을 주지 못했지만 태자당, 공청단, 상하이방, 청화방 등 명백한 편 가르기가 있었다. 물론 이런 파벌이 있었지만, 위로는 7명이 진행하는 상무위 회의부터 아래로는 정치국 회의, 전인대 회의 등의 절차가 있어 일방적인 독주는 불가능했다.
문제는 분배 가능한 자원에 있다. 중국에서 가장 확실한 부의 출처는 원재료 독점이나 제도 독점이 가능한 부분이다. 문제는 이제 가용할 수 있는 이 분야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보통 상무위원 하나가 퇴진하면 동반 퇴진하는 식솔은 백 명을 상회하는데, 이들이 먹고 살 수 있는 자원이 갈수록 가라 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자원이 다시 재정립되지 않으면 국가 갈등의 위험을 커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더욱이 후진타오 정부까지 성장률을 8%로 유지하는 바오빠(保八)를 포기하고, 그 아래로 성장률을 관리하는 상황이라 나눌 수 있는 자원은 더욱 축소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건국기념일 행사가 끝나자마자 10월 4일에는 원자바오 총리가 북한을 방문했다. 김정일이 직접 공항에 나와 원총리를 영접했고, '꽃파는 처녀'의 주인공 홍영희씨가 직접 꽃다발을 전달했다. '꽃파는 처녀'는 김일성이 1930년대 중국 지린성 창춘 일대에서 벌이는 활동을 배경으로 한 가극으로 북한을 대표하는 공연이다. 1972년에는 김정일이 직접 영화 제작을 주도한 것으로도 알려졌는데, 나름대로 북한과 중국의 가교 역할을 하는 콘텐츠로 생각한 것이다.
김정일, '꽃파는 처녀' 주인공 홍영희씨에 직접 꽃다발 전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