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옌안 인근 샨베이 고원의 모습험한 토굴로 인해 공산당은 샨베이를 장정의 종착지로 잡았고, 결국 성공했다. 이 길에는 많은 우리 애국지사들이 있었다
조창완
그런 혼란 속에 있던 2월의 마지막날 베이징으로 전화를 했다. 중앙당학교 최용수 교수가 전해인 2007년 8월19일 영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슴 속으로 끝없는 죄스러움이 밀려왔다. 내가 최 교수를 본 것은 두 번이다. 2005년 7월에 방송된 KBS스페셜 <나를 사로잡은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중국 코디를 맡으면서다.
그해 겨울 담당 PD인 양승동 선배 등과 베이징 서북에 위치한 최 교수의 집을 찾으면서다. 당시 최 교수님은 중앙당학교의 교수였다. 중국 공산당의 사료를 볼 수 있는 드문 관계자였고, 최 교수는 사재를 털어서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운동가들의 관련 기록을 찾아냈다.
유교철학을 전공했지만 조남기 장군의 조언 이후 독립운동가들의 사료를 추적해 발굴했다. 그를 통해 김산은 물론이고 한락연, 양림, 이철부, 정율성 등 항일운동 지사들의 자료를 발굴해 세상에 알렸다. 김산의 장시 '한해 동지를 조문하며' 등을 한국에 처음 소개했고, 이런 뜻을 알았기에 김산의 아들인 고영광 등 중국에 남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그를 어르신으로 모셨다. 하지만 최 교수를 찾은 한국 학자들은 최 교수가 발굴한 자료를 마치자신이 찾은 자료인양 발표해 적잖은 섭섭함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나 역시 김산 다큐가 끝난 후 최 교수에게 연락한 목적은 김산에 관한 평전을 쓰기 위해서였다. 나는 최 교수에게 공동저자로 책을 발표하겠노라고 말했지만, 선뜻 믿음이 서지 않은 듯 확답을 주지 않았다. 다른 일정으로 인해 차일피일 미루다가 급하게 귀국하면서 그 일을 잊었는데, 다른 일로 연락해 최 교수의 부음을 들었다. 전화를 받는 사모님은 영결식에 한국에서 아무도 오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쉬운 듯한 떨리는 목소리였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할 수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단재 신채호 선생 며느님 이덕남 여사 등과 통화로 감회를 청취해 뒤늦은 부고 기사를 쓰는 것이 유일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