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눈 온 다음날!
조한별
토론이 이런 특징이 있다 보니 세인트 존스에는 이런 말도 나돈다. "1학년 토론은 원석이고, 4학년 토론은 보석이다." 즉, 막 입학한 1학년은 아직 토론의 기술이 갈고 닦여 있지 않기 때문에 (좋게 말해서) 원석이고, 4학년은 많은 토론 기술들을 익혔기 때문에 좋은 토론이 가능하므로 (과장해서) 보석이라는 거다. 그럼 여기서 잠깐 1학년과 4학년을 비교해 보자. 다 장단점이 있다.
입학을 막 한 1학년의 에너지는 엄청나다. 열정 폭풍에 휩싸여 있다(1학년에 비하면 4학년은 인생 다 살아서 더 이상 신기한 게 없는 노인들 같다). 하지만 이미 언급했듯이 1학년의 문제점은 아직 좋은 토론을 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거다.
그래서 1학년 수업에는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 같은 학생들이 많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뽐내고 싶어 하는 학생, 튜터의 질문에 먼저 대답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학생, 자기 생각이 정답이라고 굳게 믿고 그것만을 주장하는 학생, 다른 친구의 이야기를 끊어 버리는 학생, 그 외 등등. 이런 학생들이 길들여지지 않은 채 다 섞여 있다 보니 1학년 때는 종종 내가 수업에 온 건지, 도떼기 시장에 온 건지 혼돈을 느끼기도 한다.
특히 수없이 충돌하고 서로가 서로를 밟고 일어서려고 하는 1학년 수업에서, 튜터의 역할은 더욱더 커진다. 너무 토론을 주도하고 있는 학생이 있으면 그 학생에게 과감히 무안을 주기도, 다른 학생들에게 기회를 주기도 하고, 토론이 너무 산으로 가고 있으면 그 방향을 다시 바로 잡기도 하는 게 튜터의 중요한 역할이다.
그럼 이제 4학년을 살펴보자. 1학년에 비해 4학년은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처럼 갈고 닦인 내공이 있어 책을 통해 좋은 생각을 이끌어 낼 줄 알고, 성숙한 토론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많은 배움을 얻는 수업을 할 수 있다…는 게 학교의 말이다(나도 4학년이지만 내가 정말 이 단계에 도달했는지 잘 모르겠네?(웃음)).
4학년 수업은 좀 더 차분하고 자아가 좀 더 숨어 있다(이 부분이 배움의 핵심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배움은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걸 인정할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귀가 쫑긋 열린다. 남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는 거다. 남의 말이라고 다 정답이고 교훈이라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다른 이의 말을 듣고, 자신의 생각도 얘기하면서 서로 다른 의견을 공유할 수 있게 되면 나로만 제한되어 있던 지식의 폭이 넓어지게 된다. 그동안의 경험과 지식만을 가지고 나 혼자 해석한 책이 다른 사람의 해석까지 받아들이게 되면서 더 풍부해질 수 있는 것이다. 배움에는 많은 종류가 있겠지만 이것 역시 진정한 배움의 한 종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배움은 좋은 토론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세인트 존스의 수업은 그 자체가 100% 토론 수업인 데다 자기주도적으로 학생들이 서로 '대화'를 통해 배움을 얻는 수업이다. 때문에 수업에서 말을 안 한다는 것은 전쟁터에서 군인이 칼을 가지고는 왔는데 칼집에서 빼지 못하고 있는 것과 다름 없고, 강의를 들으러 온 학생이 몸은 다 왔는데 머리 속의 뇌를 놓고 온 것과… 다름 없는 것이다.
그러니 학교가 말 안 하는 학생을 쫓아낸다면 어쩔 수 없구나…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또 아니다(반전의 묘미). 내가 그런 학생이거든!(웃음) 나는 겸손을 넘어선 자기비하와 수동적 교육을 받아 온 사람이라서 1학년 때부터 아주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학교에서 안 쫓겨나고 잘 살아남았다(이것만큼은 겸손을 넘어선 자기비하적 성격인 내가 자랑할 수 있을 만큼 뿌듯하다).
"오~ 얘는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안 쫓겨나고 살아 남았나?"하는 궁금증이 마구마구 커지실 것이다. 내가 세인트 존스에서 4년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생존 기술을 하나 하나 다 말하고 싶지만, 그러자면 책 한 권은 나올 것이다.
따라서 간단히 핵심만 먼저 말해 보자면, '말 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배움의 자세'에 가장 큰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즉, 말을 안 하더라도 "학생이 세인트 존스의 토론식 교육을 통해 많은 것들을 배우고 있나", "더 많은 것들을 배우기 위해 수업 시간에 입을 열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고 있나" 등을 학교에서 판단한다.
그럼 다음 질문이 나올 것이다. "어떻게 학생 하나하나를 학교에서 다 판단하나?" 그 판단은 바로 또 다른 세인트 존스의 큰 특징이자 자랑, 돈 래그(Don Rag)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이루어진다. "오? 돈 래그는 또 뭐시여?" 그건 이제 다음 편에 설명 드릴 예정이다. 하지만 힌트만 흘려보자면, 돈 래그는 '학기말 학생을 방 안에 앉혀 놓고 그 학생의 수업을 담당한 튜터들이 모여 앉아 그 학생에 대해 뒷담화(?)를 하는 것' 정도로 설명할 수 있겠다.
양파 껍질처럼 까면 깔수록 요상한 얘기들만 나오는 세인트 존스의 매력은 계속된다~
마지막 덧) 세인트 존스 칼리지가 '말 안 하면 쫓겨나는 대학'이라는 무시무시한 첫 인상을 가지게 된 데 심심한 조의(?)를 표한다. (내가 그렇게 만든 셈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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