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재언젠가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아이들 공부방은 없어도 본인 서재는 만들라고. 아내를 꼬드겨 얻어낸 나만의 습작 공간이다.
이정혁
나는 부끄러운 40이다. 정의의 불빛이 꺼진 시대. 부정과 불법으로 권력을 움켜쥔 자들에게 돌팔매질은 커녕 삿대질조차 하지 못하는 소시민이다. 법 위에 군림하는 그들과 그 하수인이 되어 법을 악용하는 견마들이 판치는 세상에 침묵하는 소인배다. 하다못해 담벼락에 대고 욕이라도 해야하거늘 처자식 핑계대고 행동할 줄 모르는 부끄러운 존재다. 안락한 생활에 도취되어 상식의 혈관에 기름기 가득 끼어도 애써 외면하는 그런 창피한 중년이다.
나는 후회없는 40이다. 누군가 나에게 시간을 되감아 준다고 하면, 화를 버럭 낼지도 모르겠다. 철모르고 흘러간 10대, 방황 끝에 스러져간 20대, 그리고 경쟁 속에 떠밀려온 30대의 터널로 되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 지난 40년간의 상처와 영광을 동시에 가슴에 새기고 다시 선 이 자리에 무릎 꿇고 감사할 따름이다. 대형 사고없이 걸어 온 이 길의 무게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나는 고민하는 40이다. 우주의 어느 공간에서 바라본 지구. 모래알보다 작은 수많은 사람들 중에, 내 존재의 이유가 무엇인지 담배 피며 늘 생각한다. 물론 아직까지 명확히 규정짓지는 못했지만, 만 갑쯤 태우다 보면, 희뿌연 연기 사이로 계시가 보일 것이다. 이 아름답다가도 황량해지는 혼돈의 공간에 던져진 이유를 조곤조곤 따져 볼게다. 그래도 답이 없다면 뭐, 덤으로 왔다가는 생도 괜찮지 않은가?
나는 본격적인 마흔이다. 80의 인생을 4쿼터의 게임으로 생각해 본다. 스무 살까지의 1쿼터는 인생이라는 긴 게임에 있어 탐색전의 시간이다. 삶을 살아가는 기본적인 지식과 기초 체력을 다졌다. 마흔 살까지의 2쿼터에서는 자리 선점을 위한 몸싸움과 득점의 시간이었다. 세상에 부딪혀 터지고 깨지면서 생존의 방법을 터득했고, 그로 인해 어느 정도 안정감을 얻었다. 그리고 이제 여유를 가지고 해볼 만한 두 게임이 남았다.
나는 희망에 찬 마흔이다. 남은 두 쿼터의 경기에서 그동안 숨겨왔던 혹은 숨길 수밖에 없었던 개인기를 펼쳐보고자 한다. 60살까지는 글을 써볼 작정이다. 30대 후반에 예기치 않게 찾아 온 시민기자라는 타이틀은 바래져가던 나의 꿈에 색깔을 찾아주었다. 한때 여드름투성이의 문학 소년이 점점 일상의 부품으로 전락하는 걸 하늘도 원치 않은 게 분명하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영혼은 깃털보다 가벼워진다.
그러하기 때문에...나는 설레는 마흔이다. 지금껏 살아온 만큼을 더 살 수 있기에 내 앞에 펼쳐진 40년은 아름답기까지하다. 60살부터는 연극배우와 연출가, 희곡 작가의 '철인 3종 경기' 레이스가 기다린다. 대학 연극반 시절, 20대 초반의 나이로 60대 노인 역을 맡아 쩔쩔매던 아마추어에서 인생의 지혜를 깨달은 노배우로 거듭나기 위해 나는 준비할 것이다. 조명 아래에서 나의 백발은 더욱 빛날 것이며, 나의 목소리는 삶을 노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