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의 아버지 사진. 매우 미남이라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김준수
아버지! 어느새 추운 겨울입니다. 자주 연락드리려고 노력했는데 최근에는 그렇지 못한 것 같아서 죄송해요. 외국에 나가서도 매달 안부를 묻곤 했는데, 요즘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뜸해진 것 같아요. 이제는 한 달에 한 번 통화하기도 쉽지가 않네요. 저도 아버지를 닮아서 기념일 챙기는 감각이 참 무딘 편이에요. 그래서 남들이 기념하는 날들, 저는 주로 무덤덤하게 보내는 편이에요. 그래서 아버지가 어떻게 느끼실지도 잘 알지만, 새해이니만큼 올해 첫 인사를 이렇게 드리려고 해요.
안녕하시죠? 여러 가지 이유로 다들 서로의 안부를 묻는 요즘이에요. 사실 지난 몇 년 동안 명절 외엔 잘 찾아뵙질 못했어요. 학자금대출로 쌓인 빚 청산하느라, 고졸 신분으로 일자리 구하느라, 그리고 비정규직으로 밤낮없이 일하느라 바빴죠. 그래도 긴 시간 동안 언제나 아버지를 떠올렸고, 그러면서 힘을 내곤 했어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가 아버지를 자주 뵙지 못한 것의 적절한 핑계가 되지는 못한다는 것은 알아요. 그래서 늘 죄송해요.
제가 군대를 갓 전역하고 일할 때, 아버지는 아버지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해주시곤 했죠. 밀양 농가에서 6남매의 넷째로 태어나, 겨우 끼니를 이어나갈 정도로 가난한 환경 때문에 학업에 뜻을 두지 못하고 혼자서 도시로 나와 일을 해야만 했다고. 국민학교 졸업식이 끝나고서 집에 들르지도 못하고 곧장 요금 80원 하던 완행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일하러 떠나야만 했다고. 그 뒤로 생판 모르던 사람의 집에 들어가 얹혀살며 일을 배웠다고 하셨죠.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 도시에서, 다른 사람 밑에서 일하고 그 사람 집에서 머슴처럼 살았다. 밥도 그 집 식구들이 식사하고 남는 반찬으로 겨우 먹으며 지냈지. 그런데도 집안형편이 안 좋았고, 네 할아버지가 폭군처럼 너무 엄해서 밀양으로 돌아가는 일은 꿈도 꾸지 못했고. 객지생활 하고 우여곡절 끝에 마산에서 야간 중학교를 겨우 졸업했다카이. 그러고는 서울에서 공장 생활도 하고, 대구 내려와서 중앙로에 있는 안경점에서 일을 배웠지. 그 뒤로 대구에서 내 가게를 열고 30년간 안경점을 했다."그 어린 나이에 고생했을 과거의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저도 힘낼 수 있었어요. 어떤 경우를 겪더라도, '아버지는 이것보다 더 힘든 것도 이겨내셨을 거야' 하고 넘길 수 있었거든요. 평소 어떤 궂은 일이 생겨도 묵묵하게 버텨내시는 아버지를 보며, 저도 어느샌가 그런 모습을 배우면서 자라게 된 것 같아요.
평생 안경 만드는 일을 하시면서, 제가 초등학생일 적에 첫 안경을 만들어주시기도 했죠. 그리고 말수가 적은 분인데도 제가 힘들 때마다 "침착하고 한 발 물러서서 생각해보자. 늘 밝게 생각하자" 하시며 많은 이야기를 저에게 해주시고 도움을 주시곤 했어요. 아직 세상을 보는 눈이 흐릿하던 시절에 아버지가 제 앞을 밝혀주신 거였어요. 제게 늘 선물해주신 안경처럼요.
제가 열아홉에 아버지의 아내, 제 어머니를 잃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누구보다 슬펐을 텐데도 아버지는 제 앞에서만큼은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셨죠. 제가 힘들어 할까봐 옆에서 다독여주시기도 하고, 제 앞에서만큼은 밝은 미소를 보여주셨어요. 서툴던 요리도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시더니 이젠 찌개도 국도 누구보다 맛있게 끓여주시기도 하고요. 덕분에 저도 좌절하지 않고 힘을 낼 수 있었어요.
늘 내게 선물해준 안경처럼, 내 앞을 밝혀주신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