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겨울이 오면, 공원안의 모든 것이 잿빛으로 변한다.
김동주
만지고 싶도록 아름다운 색깔의 호수에 닿았을 때는 잿빛으로 변해버린 후였다. 그즈음 산이 또 한 번 기괴한 소리를 내더니 짙은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이제 우리 시야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짙은 회색 빛 구름과, 빛을 잃은 대지의 풀과 나무들뿐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야영을 위한 캠프장까지 그저 걷는 것뿐이었고, 다행히 비가 뿌리기 전에 이탈리아노 캠프장(Campamento Italiano)에 도착해서 텐트를 칠 수 있었다.
어김없이 비가 쏟아졌고, 화장실도, 하늘을 가릴 작은 공간 하나 없는 더럽고 으쓱한 야영장에서 준은 목숨을 걸고 냇가에서 겨우 물을 길어왔다. 진흙투성이가 된 그의 바지와 금세 새카매진 손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우리는 버너의 불에 얼어붙은 손을 던져 넣었다.
툭툭툭.
텐트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마치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 같다. 겨우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상황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어리석은 희망을 품은 채, 마치 얼어붙은 고깃덩어리 같은 몸을 침낭에 구겨 넣고 밤을 맞았다. 과연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쯤 나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간간이 잠에서 깰 때마다 드는 생각은, 잠자는 것을 쉬고 싶었다. 쉬다가 다시 자고 싶은데 이탈리아노 캠프장에는 비는커녕 바람을 피할 공간도 없다. 좁은 벽과 벽 사이에 끼인 것 같은 텐트에서 두 번째 겪은 지독한 밤은 우리를 거의 실성하기 직전으로 몰고 갔다. 조금 가늘어졌을 뿐인 비를 뚫고 산 정상의 전망대까지 갈 것인가를 두고 서로 눈치싸움을 하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운을 시험하기로 했지만, 고지를 코앞에 두고 우리의 운은 결국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