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은 대구의 계성학교를 졸업했고, 모교에서 교사 생활도 했다. 사진은 그의 재학 당시 건물인 계성학교 옛건물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야경이다.
정만진
이 점은 교육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 예로 경성제국대학 예과(현대의 서울대학교) 학생수를 살펴보자. 1924년에는 조선인 44명에 일본인 124명(총 168명 중 조선인 26%, 일본인 74%), 1925년에는 조선인 91명에 일본인 228명(전체 319명 중 조선인 29%, 일본인 71%), 1926년에는 조선인 103명에 일본인 235명(전체 338명 중 조선인 30%, 일본인 70%), 1927년에는 조선인 104명에 일본인 204명(전체 308명 중 조선인 34%, 일본인 66%)으로 우리 땅에 세워진 대학임에도 일본인 학생이 2배 이상 재학하였다.
게다가 그렇게 숫자상의 차별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관공립 전문학교, 경성제국대학 등 고등교육 기관의 입학 여부는 실력 본위, 성적 본위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을 우선 입학시키고 다음으로는 사상 성분(친일 성향)에 따라 인물 본위로 입학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사람을 입학시켜주는 경우에도 친일파 위주로 넣어줌으로써 결국 일제는 식민지 정책에 아부하는 자들을 배출하는 통로로 대학을 이용하였으니, 이 또한 일제의 우리나라 지배를 영원히 유지하려는 음모였다.
나아가 일제는 지독한 탄압을 저질러 (기독교나 천주교, 불교 등의 종교 기관에서 세운 탓에 외국과의 관계 등도 있었으므로 국립이나 공립학교에 비해 탄압하기가 조금 더 어려운) 사립학교의 수도 해마다 급격하게 줄어들도록 만들었다. 종교계 학교가 1910년 823개였던 것이 1919년에는 260개로 격감하였고, 1940년에는 불과 120개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이는 비종교계 학교도 마찬가지여서, 1910년 1418개였던 것이 1919년에는 463개, 1940년에는 271개로 그 수가 점차 줄어들었다.
일제의 혹독한 탄압 결과 사립학교는 획일적인 기준에 맞출 것을 요구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사의 인사에서부터 교과 학습 분야에까지 타율적인 규제를 받기까지 이르렀다. 즉, 사립학교 교원이 일본어에 통달해야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일본어의 보급을 꾀하고, 당시 각급 학교별 전체 교원수에 대한 일본인 교원의 비율은 상업학교 교원 7명 중 6명이 일본인으로 86%, 보통학교는 26%가 일본인 교원이었다. 일제는 교육을 자기들 마음대로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미래를 어둡게 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