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9일 오후 부산 중구 부산역광장에서 '희망과 연대의 콘서트'를 마친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중인 김진숙 지도위원을 응원하며 영도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앞으로 행진을 벌이고 있다.
유성호
한진중공업과 짝을 이루는 단어는 '정리해고다. 회사 측은 부정하고 싶겠지만 사람들은 이 단어로 한진중공업을 기억한다. 그리고 자연스레 2011년 회사의 정리해고에 맞서 부산 영도조선소 크레인에 올랐던 김진숙씨를 생각할 것이다. 그 뒤로는 그녀를 살리겠다고 전국에서 몰려온 희망버스를 떠올릴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한진중공업이 김씨를 복직시켜 기업광고 모델로 내세우지 않는 한, 한진중공업 하면 '정리해고'다.
경영위기 책임은 언제나 노동자가 부담해야 하는가? 기업의 노사문제에 일반시민과 정치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인가?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태'는 우리 사회에 큰 물음을 던졌다. 때마침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문제와 맞물리며 "정리해고 철회! 함께 살자!"라는 구호가 터져 나왔다. 희망버스를 타고 내려온 수만 명의 시민들이 맨 몸으로 기업의 탐욕에 저항하는 김진숙의 무사귀환을 기원했다.
국회청문회를 통해 따가운 사회적 여론에 직면한 한진중공업은 2011년 말, 결국 무릎을 꿇었다. 사측은 93명의 해고자를 1년 뒤 복직시키고 생계지원금 2000만 원을 지원한다는 조건으로 노조와 합의했다. 정리해고를 막지 못하면 35미터 크레인에서 죽겠다던 김진숙은 살아 내려왔다. 해피엔딩이었다.
김진숙보다 먼저 '85호 크레인'에 올라간 사람사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3년, 김진숙이 올랐던 '85호 크레인'에 그녀보다 먼저 올랐던 사람이 있다. 김진숙과 마찬가지로 회사의 정리해고를 막아내기 위해서였다. 김진숙은 살아 내려왔지만 그는 거기서 목을 맸다. 그의 이름은 김주익(당시 40세).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지회장(위원장)이었다. 그의 죽음은 129일이 넘는 농성에도 꼼짝 않던 회사와 '귀족노조의 배부른 투정'이라 외면하던 정치권 그리고 파도만 넘실대는 망망대해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지독한 외로움 때문이었다.
한진중공업은 10년 전만 해도 재계순위 9위의 한진그룹 소속으로 2003년 부산지역 매출 1위의 기업이었다. 2002년, 당기순이익이 239억 원의 이 흑자기업은 '인력체질개선작업'이라는 이름으로 구조조정을 실시한다. 1000여명의 노조원들은 정리해고를 반대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회사는 노동조합에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손해배상을 통해 노동조합을 압박하는 것은 당시 기업의 새로운 대응전략이었다. 회사는 김주익을 비롯하여 노조간부 20명의 주택과 임금에 7억4천만 원의 가압류를 걸었다. 확인사살이었다.
이 회사에 들어온 지 만 21년, 그런데 한 달 기본급 105만 원, 그중 세금 등을 공제하고 나면 남는 것은 팔십 몇만 원. 근속년수가 많아질수록 생활이 조금씩이라도 나아져야 할 텐데 햇수가 더할수록 더욱더 쪼들리고 앞날이 막막한데 이놈의 보수언론들은 입만 열면 노동조합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난리니 노동자는 다 굶어죽어야 한단 말인가. - 김주익의 2003년 9월 9일자 유서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