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용석 동상 비정규직을 철폐를 주장하며 분신한 이용석
이재언
고등학교 교사 권오정(32)씨는 2003년 10월 26일을 잊지 못한다. 지금으로부터 꼭 10년 전이었다. 대학생이었던 오정씨는 학과 소모임 신입생들과 서울 종묘공원에서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공동으로 개최한 노동자 집회에 참가했다. 비정규직 차별을 규탄하는 집회였다.
집회가 마무리 될 무렵이었다. 종묘공원 화단 가운데에 앉아있던 권오정씨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참가자들의 날카로운 비명을 듣고 달려간 자리에서 어느 노동자가 불타고 있었다. 화염과 함께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불에 타는 가운데도 그는 "비정규직 차별 철폐하라"고 구호를 외쳤다. 주위 사람들이 옷가지로 그의 몸을 덮어 불을 껐다. 그가 불탄 자리에 검은 그을음이 남았다.
그의 이름은 이용석(당시 31세). 근로복지공단 목포지사의 계약직 노동자였다. 그는 신안군의 작은 섬 상태도에서 태어나 전남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했다. 바쁜 직장생활 틈틈이 저소득층 청소년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던 반듯한 청년이었다.
이용석 열사의 10주기를 앞둔 지난 10월 11일, 열사의 여동생 이선화씨(40) 부부와 '이용석 열사 정신계승사업회' 김태진 집행위원장, 그리고 당시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동조합 활동을 함께 했던 동료들을 만났다.
오빠의 분신에 배후가 있지 않을까? "오빠가 노동조합 활동을 했는지도 몰랐어요. 솔직히 저나 고향 사람들은 당시 경찰의 분신배후설이 사실이 아닐까 생각했죠." 여동생 선화씨가 말했다. 이용석씨의 분신 직후, 당시 김성훈 영등포경찰서장은 "과거 학생운동이 거셀 때를 생각해보면 요즘도 거기 위쪽에서 기획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며 "분신에 배후(민주노총 지도부)가 있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가족인 선화씨도 당시에는 경찰의 '분신배후설'을 사실이 아닐까 의심할 만큼 이용석씨는 노동운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오빠의 죽음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이 얼마나 큰 사회적 문제인지가 알려진 거죠. 이젠 가정주부나 학생들도 비정규직 차별은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있잖아요."
선화씨는 오빠의 죽음이 가져온 우리 사회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노동계에서는 이용석씨를 '최초의 비정규직 열사'라고 평가한다. 이용석씨의 죽음 이후 비정규직 차별 문제가 우리 사회 중요 노동문제로 떠올랐다.
이용석씨가 대학을 졸업한 1998년, 대한민국은 외환위기로 국가 경제가 꽁꽁 얼어 있었다. 경기가 위축되고 청년실업이 유행처럼 번졌다. 공기업 입사를 준비하던 이용석씨는 선배의 소개로 2000년 2월에 근로복지공단 목포지사에 들어갔다. 고용보험 신고서류를 담당하는 3개월짜리 일용직이었다. 김대중 정부가 공공부문 경영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정규직을 줄이고 비정규직을 늘린 탓에 생긴 일자리였다.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며 당선된 노무현 정부 들어서도 이용석씨는 비정규직이었다. 계약기간이 3개월에서 1년으로 늘었을 뿐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카드대란으로 촉발된 경기침체에 속수무책이었다. 기업투자와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보수언론의 압박이 이어졌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업하기 좋은 환경이 필요했다. 결국 노무현 정부도 비정규직을 확대하는 '노동유연화'로 방향을 틀었다.
2003년 8월 당시 공단의 전체 직원의 34%가 비정규직이었다. 상급기관인 노동부조차 직업상담원 등 전체 직원의 50%에 가까운 인력을 비정규직으로 채웠다.
'잡비'로 월급 받던 비정규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