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길 앞에서 그대 걷고 있는가 망월묘역 입구 수많은 만장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정미경
나의 또 다른 기사의 주인공인 두 분 장기수 선생님의 근황은 어떤가. 82살의 P선생님은 쓰러지셔서 거동이 불편하시고 S선생님도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오랜 수감생활과 극심한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이다. 쓰러지신 P선생님은 회복이 더뎌 이젠 사람도 거의 못 알아보신다. 아마도 P선생님은 영영 못 일어나실 것 같다. P선생님과는 다큐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를 같이 보고 싶었다.
그런데 하필 개봉 시기에 맞춰 선생님이 쓰러지셨고 그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P선생님은 과거 남파공작원을 실어 나르던 공작선의 선장이었다. 천안함 사태가 발생하면서부터 선생님은 직업적 본능으로 진실을 간파하셨다. '천안함 피폭? 웃기지 말라 그래' 선장 출신의 노 투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불편한 심경을 토로하곤 하셨다. P선생이 가시고 나면 S선생님은 외롭게 혼자 남으실 것이다.
S선생님은 내게 원조 남자친구였다. 30년 수감 생활을 마치고 나온 선생님이 자서전 집필을 모색 중인 과정에 우리는 만났다. S선생님을 통해 고인이 되신 Y선생님, P선생님 등 비슷한 처지의 주변 분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분들은 S선생님을 매개로 얽히게 된 '넝쿨째 굴러온 종북'세력이었다. 처음 S선생님을 만났던 것처럼 다시 다른 선생님들은 세상을 떠나고 조만간 내 옆에는 다시 S선생님만 남게 되겠지만 S선생님도 앞날을 마냥 기약할 수 없다. 선생님은 올해 86살이시다.
"야. 남들이 나 부럽단다. 너 같은 딸 있다고. 히히."P선생님 문병을 다녀온 날 함께 우리 집으로 와서 거실 소파에 앉자 느닷없이 S선생님이 하신 말씀이다."제가 선생님 딸이라고요?""사람들이 그러더라, 네가 내 딸이라고 흐흐. 아까 병실에서 P선생 제수씨도 그러지 않던?""선생님 딸 노릇은 별로 내키지 않는데요? 황장엽이라면 모를까.""야! 넌, 나만 보면 꼭 그 재수 없는 인간 이야기를 하더라.""그 '재수 없는 인간'은 그래도 수완이 좋아서, 죽을 때 수양딸한테 재산도 많이 남겼답니다. 똑같이 북에서 내려 와서, 같은 대학 출신에, 당연히 비교가 되죠. 선생님의 새로운 동문 조명철이라는 사람은 또 어떻고요? 권은희 과장한테 '당신, 광주 경찰이냐, 대한민국 경찰이냐' 눈 부라리며, 남한사회에서 튀어보겠다고 '열심히' 하잖아요. 거기 비하면 선생님은... 엄청 무능하신 거예요."남편이 중재에 나섰다.
"그러니까 선생님. 이 사람 말은요. 선생님도 이제 보호관찰 그런 거 지나치게 의식하지 마시고 밖에도 다니시고 활동도 하시고 그러시라는 뜻입니다.""김 서방. 난 말이지. 이 꼴 저 꼴 당최 보기가 싫어. 정치판 돌아가는 꼬락서니도 신물 나고 밖에 나와 돌아봐도 다 꼴불견이고." 선생님은 얼마 전 세상을 뜬 당신의 동생 장례식조차 불참하셨다. 무슨 낯으로 제수씨를 보겠냐며 가지 않으셨다. 형인 자신 때문에 과거 감옥생활은 물론 고문까지 당했던 아픈 사연을 품고 있었다. 동생의 발인식이 진행되고 있던 그 시간에 선생님은 나랑 두어 시간에 걸쳐 오래 전화통화를 하시면서 애써 태연한 척 엉뚱한 말만 늘어 놓으셨다.
내색을 안 해도 선생님의 힘없는 목소리에서 자신 때문에 고통을 받은 피붙이를 먼저 떠나보내는 참담한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남한 최고 대학을 나온 동생들이 연좌제라는 덫에 걸려 정상적인 사회활동이 불가능했고, 그 불행의 여파는 현재진행형이다. 남한에서 태어나 자란 선생님은 남쪽에 부모형제들의 묘가 있고 북에는 60년 동안 생사조차 모르는 처자식이 있다.
"아무데도 쓸모없는 나 같은 노인 누가 반긴다고.""그래도 해마다 5·18이면 선생님들하고 망월동 다녀오고 식사 같이 하고 그랬는데 올해는 그러지 못해 서운했습니다. 반갑지도 않은 대통령 좀 온다고 팔십 넘은 노인들 행차를 막고 그러는지 이해가 안 됐습니다.""그게 말이지. 괜히 움직여서 담당 형사 곤란하게 하고 싶지가 않더라고." 출입처 동화라는 것이 기자들 세계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담당형사와 피감찰자 사이에도 출입처 동화 현상이 심각한 상태로 진행 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외로운 독거노인에게, 담당형사의 정기적인 방문이 사회복지사의 보살핌처럼 받아들여 질 수도 있다. 그리고 요새 형사들의 감찰 행위는 굉장히 세련되고 인간적이다. 그래서 감찰자의 본래 방문 의도를 망각하고 피감찰자 스스로 형사에게 '협조'하게 하는 기현상이 발생한다. 보호관찰 기간이 몇 십 년 장기화 되다 보니 빚어진 부작용이다.
언젠가 선생님은, 담당 형사가 진급했다고 자신 일처럼 기뻐하셨다.
"야! 내 담당, 이번에 경위로 승진했다. 기특하지? 허허""세상에! 보호관찰 대상자 처지에 담당형사 승진한 것이 그렇게 좋으세요?"그런 선생님이니 형사 '일하기 좋게' 대통령이 망월동에 왔던 올해 5.18에는 자진해서 댁에 얌전하게 계셨던 것이다. 순전히 담당 형사에게 협조차원에서 말이다.
"저번에, 경위 승진했다고 자랑하시던 그 사람 아직도 담당이에요?""아니. 진즉 바뀌었지. 그런데 그 친구, 저번 경감시험에서 아깝게 미끄러졌단 말이다. 아니, 아슬아슬하게 커트라인에 걸려 떨어졌어.""그 형사라는 사람은, 피감찰자한테 와서 감찰 업무는 안하고 맨날 자기 승진문제나 의논하고 그래요? 선생님 같이 관운 없는 노인한테 승진 문제를 의논하는 사람이면, 떨어지는 게 당연하죠.""그래도 그 나이에 '경위' 달았으면 남들보단 엄청 빠른 거여!""보세요 .선생님은 이십년 된 나보다 수시로 바뀌는 형사들을 더 생각하신다니까. 그러면서 딸은 무슨." 86세의 선생님은 거동뿐 아니라 기억력도 급격히 쇠퇴해 자꾸 실랑이를 하게 된다. 예전에 몇 번 했던 말을 처음 하는 거라고 우기시고 처음 듣는 이야기를 옛날에 분명히 했는데 내가 잊어먹었다고 나무라신다.
선생님의 구술은 거의 '이 말은 내가 너한테만 해주는 이야기인데.', ' 내가 저쪽에 있을 때' 또는 '내가 안에 있을 때'로 서두가 시작 된다. '저쪽'은 스스로 선택한 체제 북한을 뜻하고 '안에'는 30넘게 거주했던 교도소를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모두 비밀유지를 전제로 한다. 나는 다시는 그분들을 필화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던 스스로의 약속을 점검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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