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돌반지 팔까?" 생활이 어려웠던지 아내는 어느날 그렇게 말했습니다.
변창기
저처럼 공장생활 하던 사람들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귀농 같은 걸 하려는 자체가 무모한 도전이었습니다. 몇 개월 살다가 서울로 이사했습니다. 서울은 엄청 큰 도시이니 저같은 기능없이 단순노무직종을 찾아보면 있겠거니 생각했었습니다.
서울역에서 가까운 곳에 허물어질 듯한 기와집이 있어 그곳에 전세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서울로 이사 후 다시 직장을 찾아 헤맸습니다. 교차로를 보면서 직장을 찾았으나 마땅한 일자리가 없었습니다. 가족들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겠기에 당장 급한 대로 은행 청원경찰 자리를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찾아가니 모두 파견용역업체였습니다. 처음 파견된 곳은 압구정동 어느 지역에 있는 평화은행. 그때가 1999년이었고 월급이 80만 원 수준이었습니다. 은행서 주는 10만 원 별도 수당을 보태 90만 원. 우리 가정은 그렇게 서울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아이들 돌반지 팔까?"생활이 어려웠던지 아내는 어느날 그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자식들 돌반지를 나중에 결혼하게 되면 기념으로 주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정규직 일자리가 아닌 비정규직 일자리로 생기는 월급으론 생활비가 턱없이 부족했던지라 돈 빌릴 곳도 마땅찮은 우리로서는 달리 돈 만들 방법이 없었습니다. 아내는 자식들 돌반지를 팔아서 생활비에 보탰습니다. 저는 며칠간이나 안쓰러운 마음에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처럼 기술과 기능이 없는 사람이 서울서 사는 것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압구정 평화은행이 문을 닫았습니다. 다른 일자리를 찾자니 없었습니다. 그러다 찾은 게 서울 고속터미널서 가까운 반포동 근처에 있는 보람은행 청경자리였습니다. 그곳은 75만 원 월급에 10만 원을 은행에서 주는 수당으로 받았습니다. 그마저도 은행이 어렵다며 나중엔 5만 원 깎아 버렸습니다. 몇 개월 후 다시 보람은행이 없어지고 하나은행으로 통폐합되었습니다. 간판 공사를 하더니 하나은행으로 모든 시설물이 바뀌었습니다.
2000년 5월 도무지 안 되겠다 싶어 다시 울산으로 내려왔습니다. 그 사이 서울역 전세집에서 사당동 전세집으로 한 차례 집을 옮겼고 사당동 전세집 주인이 집을 비워 달라고 했습니다. 당장 오갈 데도 없고 해서 약 2년 정도의 서울 생활을 접고 다시 울산으로 내려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울산 와서 2개월 정도 직장을 알아 보다가 우연찮게 현대자동차 사내 하청업체를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10여년 동안은 그럭저럭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는데 2010년 3월 중순경 느닷없이 잘 다니던 하청업체서 정리해고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생계 걱정이 다시 시작 되었습니다. 이곳저곳 2차·3차 하청업체 다녀봤지만 적응을 하지 못해 스스로 그만 두었습니다. 이리저리 떠밀리며 비정규직으로 살다보니 우리 가정의 생계문제가 다시 곤두박질 치게 되었습니다.
"나머지 다 팔아야겠다."아내는 남아 있던 폐물을 꺼내면서 말했습니다. 선물로 받은 은수저 세트와 결혼 예물 반지와 팔찌, 목걸이가 있었습니다. 저는 깊은 한숨이 나올 뿐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과 미안한 마음만 교차되었습니다. '돈 잘 버는 남편 만났더라면 이런 고생 안 할텐데…'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아내는 귀금속 집에 가서 나머지 귀금속을 모두 처분해서 생계비로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