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팡코르의 석양. 더스틴이 그린 그림.
이수지
페낭을 떠나기로 했다. 문제는 출발은 하는데 도착지가 없다는 거였다. 인도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까지는 아직 열흘 정도가 남아 있었다.
이렇게 큰 나라를 여행하는데 열흘이라니. 갈 곳이 너무 많아 어디를 가야할지 골머리를 싸매야 할 것 같지만 웬걸, 말레이시아의 전 국토는 설 연휴를 앞둔 휴가 분위기로 들끓고 있었고 어디를 가든 관광객으로 꽉 차 있을 것이었다.
우기라는 것은 여름에 있는 게 보통이지만 하필이면 우리가 지금 체류하고 있는 말레이시아는 겨울이 우기다. 덕분에 더스틴이 가고 싶다던 동부의 해변들은 아예 출입이 금지된 상태였다.
설 연휴를 가족과 함께 보내지 않고 온 죗값이다.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타만 네가라(국립공원), 랑카위 섬, 태국 남부 섬 정도였다. 하지만 그곳들이라고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타만 네가라를 간다면 설 연휴로 몰려든 관광객들과 우기로 불어난 거머리들 때문에 발 디딜 틈이 없을 것일 뿐더러, 디딜 틈이 있다 하면 거머리를 밟게 될 것이었다.
태국 남부 섬도 말레이시아에서 가는 관광객들로 복작댈 것은 마찬가지였다. 랑카위 섬은 면세 쇼핑을 하기에 좋은 곳이라는, 우리한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장점 말고는 볼 만한 게 없는 섬 같았다. 에라이. 세 군데 다 문제가 있다면 그냥 가고 싶었던 데를 가면 그만이다. 타만 네가라로 간다.
조지 타운의 버스 정류장은 꽤 커서 10개 정도의 버스 라인 사이로 차와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는 분주한 사람들 가운데 멍청히 서서 타만 네가라로 가는 버스를 찾아보았다. 한참을 서성이다 근처에 있는 여행사 사무소에 물어보았다. 여행사는, 타만 네가라로 가는 버스는 페낭 섬의 반대편에서 타야 하는데 이곳에서 차를 타고 30분 걸리는 거리라고 했다.
"팡코르 어때?"반대쪽까지 또 언제 가느냐는 귀찮음에 금세 좌절된 나는 책을 뒤적이다 본 섬의 이름을 불쑥 내뱉었다. 누군가에게는 평생 살았을 고향이었을 곳을,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채 살다가 이렇게 불쑥 찾아가기도 한다. 뭐가 들었을지 모르는 땅을 조금씩 밟으며 넓혀 나가는 지뢰 찾기 게임을 하는 기분이랄까.
"팡코르가 어딘데?""…나도 잘 모르는데 말이지. 일단은 섬이야.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석양을 보고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을 흘렸다는 곳이라나."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성악가이고 예술가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감정이 풍부할 것이고, 그런 사람이 눈물을 흘리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혹은 석양을 보고 있었던 그 시점에 어렵고 힘든 일이나 기쁜 일이 연상되어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눈물을 흘렸건 말건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고 솔직히 별로 관심도 없지만, 당장 어디로 갈지 결정을 해야하는 지금 이 상황에서는 진로를 정하기에 충분한 변명거리였다.
파바로티가 눈물 흘렸다는 섬으로 무작정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