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낭의 극락사붉은 한자가 새겨진 페낭의 불교 사찰 극락사
이수지
페낭, 더 넓게는 믈라카 해협의 이러한 다문화 유산은 영국이 조지타운에 기지를 세우기 훨씬 전부터 축적되어온 것이었다. 해상무역과 동서양 교류의 중심지였던 말레이 해협은 강력한 왕국들을 탄생시키는 동시에, 가깝고 또 먼 곳에서 오는 이민자들로 다문화적 정체성을 굳혀가고 있었다. 믈라카 왕국이 탄생한 15세기 무렵 급격히 성장한 이 지역에는 무수히 많은 민족이 살고 있었으며 무려 80개가 넘는 언어들이 사용되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16세기 포르투갈이 이곳을 정복했고, 이전에 세워진 많은 이슬람 양식의 건물들이 인위적으로 손실되는 일도 있었지만, 민족 저마다의 문화, 그리고 다른 민족과 함께 어울려 사는 다문화주의는 더 굳건해졌다. 이후 네덜란드의 지배까지 거친 말레이시아는 중국식 저택, 불교 사찰, 회교도 성당, 힌두 사원에 크라이스트 교회와 같은 서양식 건물까지 고루 갖춘, 다양함에 다양함을 더한 다문화 도시로 자리매김했다.
500년에 걸쳐 이민자들과 함께 무역과 문화의 꽃을 피우며 발달한 도시.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식민지 시대를 거쳐왔지만, 그 잔해를 없애기보다는 자신의 것으로 끌어안고 말레이시아만의 독특한 문화유산으로 승화시킨 도시. 상처를 받았지만 그것을 끌어안고 성장하는 멋진 한 인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어차피 과거는 돌이킬 수 없고, 상처는 흐려질 뿐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순백의 깨끗했던 지난날이 아쉽지만, 길을 걷자면 넘어지는 것이고, 같이 있자면 상처를 받는 것이다. 어차피 완벽해질 수 없고,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불가하다면, 다 끌어안는 수밖에 없다. 과거의 아픈 기억도, 잘못도, 실수도, 떠나간 사람들도 다 인정하고 끌어안는 거다. 말레이시아처럼.
이런 잡생각에 빠져 있다, 길을 잃었다.
멀고도 험한 '야시장'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