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수연씨의 책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표지
이매진
솔직히 앞에 있는 사람이 과연 친족성폭행의 피해자가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잘 웃고 대화할 때 제스처도 무척 다채롭고, 말 그대로 '고생 안 한 티가 풀풀 나는' 자립심 강한 독신 여성으로 보였다. 하지만 상처가 할퀴고 간 흔적은 다음과 같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사람이 나를 괴롭게, 살기 싫게 만들던 그 시간 동안 계속 미워했고, 집을 나온 뒤에도 내 분이 풀릴 때까지 힘껏 미워했다…(중략)…집에 있을 때는 소리 내서 욕하지도 울지도 못한 게 억울해서 집을 나온 뒤에는 미친년처럼 보이든 말든 울고 싶을 때는 짐승 소리 내며 울었다. 교회든, 사무실이든, 혼자 방에 앉아서든, 친구와 통화를 하면서든, 잠자리에 누워서든, 화장실에 앉았을 때든,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눈물이 나면 울었다. 뭔가 세게 때리고 싶을 때는 베개나 쿠션을 막 때리기도 했고, 집어던지고 싶을 때는 집어던졌다…(중략)…그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짧지 않을 뿐 아니라 쉽지 않았다. 또한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특히 나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더 그랬다."용서해야 하는데……용서는커녕 죽여 버리고 싶으니 어쩌죠?"나는 미워하며 지내는 동안 예수님에게 기도했다, 솔직하게."예수님, 지금은 어려워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제 미움을 처리할 시간이 필요해요."-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중에서은수연씨가 쓴 책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는 4년 넘게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소식지에 연재한 글을 모은 것이다.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죽여 버릴 거야"라는 그 사람의 말에 맞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당한 일을 말하게 되면서, 아빠라고 불리는 사람은 법적으로 자신의 죗값을 치르게 됐다.
수능 전날 아빠에게 당한 폭행 생생하게 묘사하지만 그 이후에도 자신의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일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내 상처를 말해야 진짜 친구가 되는 것 같고, 상처를 통해서만 자신을 이해받고 배려 받으려하는 자신이 구차했고, 그런 상황에 지쳐간 것이다. 은수연씨가 글쓰기를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그녀에게 롤모델이 된 책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와 안네 프랑크의 <안네의 일기>였다. 두 책 모두 독일 나치 정권 밑에서 고통을 겪은 사람들의 일상을 자세하게 묘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빅터 프랭클은 정신과 의사인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혀서 수용소 생활을 합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보면 이 사람이 계속 경험한 것을 기록하거든요. 그 안에서 씻었던 사람, 그래도 면도를 했던 사람은 살아남았다는 거예요. 포기한 사람은 죽고요. 어떤 사람은 꿈을 얘기하는데, '몇 월 며칠날 전쟁이 끝난대!' 이렇게 얘기를 해요. 그런데 그 날이 가까이 오는데 아무 변화가 없잖아요. 그 사람은 그 날이 지나고 죽었다는 거예요. 결국엔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살더라는 거죠. 저는 그런 생존자들의 기록 같은 것을 보는 걸 좋아해요.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에 이런 얘기가 나와요.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이 말이 저한테 너무 딱 맞았어요. 또 이런 문구도 있었어요.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이 문구를 읽고 '그래서 내가 강하구나'라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책을 쓴 후 좀 더 부드러워지고 여유로워졌지요."자신의 경험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수능 전날 시험장 근처에 잡은 숙소에서 아빠에게 밤새 지독한 폭행을 당한 상황을 아래의 글처럼 묘사할 때면 계속 눈물이 났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글이 잘 진척이 안 되고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하지만 은수연씨의 말대로, 눈물을 흘려가며 더욱 사실적으로 묘사할수록 그 일은 더 이상 그녀에게 고통이기를 멈추게 된다.
쉬면서 힘을 되찾았는지, 이제는 벗어놓은 바지를 들어 아주 천천히 허리띠를 빼기 시작했다. 허리띠가 스르르 풀려 나오자 그것을 한쪽 손에 몇 바퀴 감고 있다."너 오늘 맛 좀 봐라."나는 순간 오줌을 쌌다. 거실 흥건히 오줌을 싸버렸다. 일부러 쌌고, 모르고 쌌다. 오줌이 나올 줄 몰랐기도 했지만, 온몸에 힘이 풀려버렸다. 예전에 한 번 반 죽도록 맞는데, 오줌 싸러 가고 싶다는 말도 못 하고 맞다가 오줌을 싼 적이 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매를 때리다 멈춘 적이 있다. 그걸 노린 것도 있다. 제발 허리띠로는 맞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람에게 20년 넘게 매를 맞은 엄마도 그 사람이 허리띠만 풀면 기절할 듯 무서워하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중에서사진으로 찍듯 글로 자세하게 당시의 상황을 묘사해서 책으로 내니, 아픈 기억을 마치 물건처럼 잘 포장해서 캐비닛에 정리한 느낌이라고 한다. 책이 바로 그녀의 캐비닛인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의 안에 부유하면서 돌아다녔던 상처, 그리고 몸으로 기억하고 있는 아픔을 뽑아냈고, 상처 자체에 매여서 울거나 힘들어하는 것이 많이 없어졌다고 한다.
은수연씨는 책을 낸 후 성폭력 전담 판사들과 토론회를 했는데 판사 120명이 모였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그녀는 피해자의 눈으로 본 성폭력에 대해 얘기하면서 성폭력을 교통사고에 비유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