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옥정의 무덤인 대빈묘.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소재.
김종성
이렇게 되자 각 당파의 목표는 중전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됐고, 이것은 왕비 책봉권을 가진 숙종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장옥정, 인현왕후, 최숙빈(숙빈 최씨, 영조의 생모) 같은 여인들의 명암이 엇갈렸다. 서인당 쪽인 인현왕후나 최숙빈처럼 남인당 쪽인 장옥정도 이런 구도의 피해자였다. 숙종시대에 당파투쟁과 여인천하가 연계된 양상을 살펴보면, 이 점을 좀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숙종의 첫 번째 왕비는 인경왕후였다. 인경왕후는 숙종이 세자 시절에 결혼한 여인이다. 그러므로 당파투쟁과 여인천하가 연계되는 양상은 인경왕후와는 관계가 없었다. 이런 양상이 출현한 것은 인경왕후가 사망하면서부터였다.
숙종은 남인당이 정권을 잡은 1674년에 왕이 됐다. 그런데 서인당이 경신환국이란 정변으로 권력을 되찾은 1680년에 인경왕후가 사망했다. 서인당이 집권당이 된 상태에서 중전 자리가 공석이 되자, 이듬해인 1681년에 서인당 출신인 인현왕후가 두 번째 왕비가 됐다.
8년 만인 1689년에 기사환국이란 정권교체가 발생하고 남인당이 권력을 잡았다. 그러자 바로 그 해에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이듬해에 장옥정이 왕비가 됐다. 하지만, 4년 만인 1694년에 갑술환국으로 서인당이 재집권하자, 장옥정이 후궁으로 격하되고 인현왕후가 복귀했다.
그 후로는 서인당과 그 분파들(노론·소론)이 계속 정권을 잡았고, 인현왕후가 죽은 뒤에는 같은 서인당 출신인 인원왕후가 왕비가 됐다. 인현왕후가 복귀한 뒤로는 서인당의 파워가 예전 같지 않았기 때문에, 서인당의 장기 집권이 숙종의 왕권에 별다른 지장을 주지는 않았다.
사랑보다 권력이 소중했던 숙종, 장옥정을 내버리다위와 같이 숙종은 당파투쟁의 추이를 보아 가며 왕비를 교체했다. 집권당이 너무 세졌다 싶으면 기존 왕비에 대한 싫증을 표시함으로서 야당에 힘을 실어주고, 야당이 어느 정도 세지면 야당 쪽 여인을 왕비로 만듦과 동시에 집권당도 교체했다.
이런 과정에서 장옥정도 희생양이었다. 숙종은 장옥정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다른 여인들을 이용하듯 장옥정도 이용하다가 결국 내버렸다. 숙종에게는 사랑보다는 권력이 더 소중했던 것이다. 숙종의 버림을 받은 장옥정은 중전 폐위와 사형이라는 연이은 불행을 당했다.
숙종시대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장옥정은 인현왕후·최숙빈과 더불어 이 시대 정치의 피해자이자 희생양이었다. 장옥정은 숙종이 왕권강화를 위해 이용하다가 내버린 여인 중 하나였다. 그런데 <사씨남정기>라는 문학작품마저 장옥정을 교활하고 악독한 여인으로 만들어놓았다. 숙종은 장옥정을 악용하고 김만중은 장옥정에게 먹칠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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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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