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이 수감된 장소인 서대문형무소 지하감옥.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 소재.
김종성
고향에 내려간 유관순은 연락책 겸 태극기 담당이 되어 4월 1일 아우내 장터 시위를 조직했다. 시위 당일, 그는 부모님과 함께 장터로 나갔다. 온 가족이 시위에 함께 참여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3·1운동 때는 그런 풍경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1919년 3월과 4월에 한국인 2천만 명 중에서 1백만이 시위에 참여했다고 집계했지만, 실제로는 2백만 명 정도가 참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은 한국인들이 1910~1919년 9년간 목격한 일제 통치에 치를 떨었다는 증거다. 그래서 한국인의 10%가 목숨 걸고 일제의 총칼에 대항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유관순 가정을 포함한 수많은 가정이 가족 단위로 시위에 참가했던 것이다.
장터에 나간 유관순은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만세를 외쳤다. 선두에 섰으니 위험을 피할 수 없었다. 같은 민족이 통치하는 세상 같았으면 최루탄을 맞거나 방패에 얻어맞는 정도로 끝날 수도 있었겠지만, 이민족이 통치하는 세상이었기에 그는 일제 헌병의 총검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선두에 선 유관순은 총검을 맞고 고꾸라졌다. 최루탄 대신 총검을 맞은 유관순의 몸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그런데도 헌병은 소녀의 머리채를 잡고 발로 폭행을 가했다. 바로 뒤에 있던 소녀의 부모가 이 장면을 죄다 목격했다.
나중에 유관순은 서대문 감옥에 투옥된 뒤, 감방 동료인 독립운동가 어윤희 선생에게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이 회고를 들은 어윤희의 증언에 따르면, 어린 딸이 헌병의 칼에 찔리고도 계속해서 얻어맞자 부모님은 통곡하면서 그 뒤를 따라갔다. 그러면서도 부모님은 "대한독립 만세!"를 계속 외쳐댔다. 유관순으로서는 자기 몸의 고통보다 부모님의 만세 소리가 더 슬프게 들렸을 것이다.
헌병들 앞에서 "아버지를 살려내라!"며 통곡... 부모님 시위현장서 순국이렇게 부모님은 끌려가는 딸을 따라가며 "대한독립 만세!"를 절규했다. 그런 중에 아버지는 일제 헌병이 쏜 총알에 맞아 쓰러졌다. 그러자 유관순은 헌병들 앞에서 "아버지를 살려내라!"며 통곡했다. 잠시 뒤에는 어머니마저 쓰러졌다. 부모님 두 분이 동일한 시위 현장에서 순국한 것이다.
유관순은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헌병의 손에서 가까스로 벗어났다. 시위대가 해산된 뒤 그는 잠깐 숨었다가 경찰에 붙들렸다. 그런 뒤 수감되어 재판을 받고 치열한 법정투쟁 및 옥중투쟁을 거쳐 이듬해 열아홉의 나이로 서대문형무소 지하감옥에서 순국했다. 유관순은 시위 현장에서 일본 제국주의가 부모님을 죽이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것은 그가 법정과 감옥에서 보다더 처절한 항일투쟁을 하도록 만든 요인 중 하나였다.
특히 서대문형무소 지하감옥에서 유관순은 쉴 새 없이 만세를 외쳤다. 그때마다 며칠씩 밥을 굶기고 고문을 가하는데도 그는 무조건 만세를 불렀다. 징역형을 받았기 때문에 석방이 예정된 상태였는데도, 그는 그런 희망을 품지 않고 무조건 만세를 외치다가 가혹한 고문을 받고 순국했다. 아무런 계산도 없이 제국주의 일본에 대한 무조건적 거부를 표시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투쟁은 순수한 것이었다.
유관순은 직업적인 투사도 아니고 준비된 운동가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여학생이었다. 그러나 불우한 시대는 평범한 소녀의 정치의식을 일깨웠고 그가 시대의 모순에 용감히 저항하도록 하였다.
평범한 여학생이었다가 3·1운동의 상징으로 우뚝 선 유관순의 삶은, 시대의 모순이 자기 온몸을 자극하는 결정적 순간이 오면, 평범한 소시민들도 유관순처럼 용감하게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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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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