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모궁 터. 서울시 종로구 연건동 소재. 서울대 의과대와 서울대병원 사이에 있다.
김종성
정조는 죽기 5년 전인 1795년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어머니의 환갑잔치(진찬연·진찬례)를 열었다. 한양에서 해도 될 환갑 잔치를 화성까지 가서 한 것은 이곳에 아버지의 무덤이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아버지가 있는 수원 화성에서 어머니의 진찬연을 엶으로써 두 사람의 화해를 상징적으로나마 연출하고 싶었을 가능성이 있다.
정조가 화성에서 진찬례를 연 것을 정조의 효심으로만 해석하는 관점이 있다. 물론 그런 측면도 있지만, 어머니를 심리적으로 압박해서 아버지와의 화해를 강요한 측면이 강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누구보다도, 혜경궁 본인이 이 잔치를 효심의 증거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같다. 환갑잔치가 있었던 그해부터 혜경궁이 <한중록>을 의욕적으로 집필한 사실에서 그 점이 잘 드러난다.
<한중록>이 전달하는 메시지 중 하나는 '사도세자는 미치광이라서 죽을 수밖에 없었고 홍씨 가문은 이 죽음에 책임이 없다'는 것이었다. 자신과 남편의 화해를 은근히 촉구하는 정조에 맞서, 혜경궁은 <한중록>을 통해 '나와 우리 집안은 네 아버지의 죽음에 책임이 없다'는 메시지로 대응한 것이다.
사실, 사도세자의 정신 건강에 관한 <한중록>의 기록은 거짓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만약 사도세자가 정말로 미치광이였다면, 그가 1749~1762년 사이에 영조를 대신해서 대리청정(주상 권한대행)을 수행한 사실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미치광이가 13년이나 국정을 운영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사도세자에게 정신적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아주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는 점은 영조 38년 5월 22일치(1762년 6월 14일) <영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죽기 전에 아버지 영조와 언쟁할 당시 사도세자가 "제게 본래 화증이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영조는 "차라리 발광을 하지 그러느냐?"라고 대꾸했다.
이것은 화증을 앓은 것은 사실이지만, 미치광이인 발광 상태까지는 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만약 사도세자가 미치광이였다면 영조는 "네 상태가 화증 정도냐? 넌 이미 발광한 사람이야!"라고 응수했을 것이다. '차라리 발광을 하지 그러느냐'라는 말은 아직 발광을 하는 상태는 아님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도세자를 미치광이로 묘사한 <한중록>의 내용이 허위임을 반영하는 것이다. 남편의 정신병을 숨겨야 할 아내가 남편을 미치광이로 묘사한 것만 봐도, 혜경궁과 사도세자가 정상적인 부부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는 화성이 혜경궁에게 어떤 느낌을 주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하필이면' 그런 곳에서 60세 생일 잔치를 열어주는 아들의 '얄미운 효심'을 혜경궁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때부터 열심히 <한중록>을 집필한 것을 보면 정조의 '얄미운 효심'에 대해 혜경궁은 반발심을 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들 효심이 불편한 혜경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