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왕의 꿈>의 선덕여왕(홍은희 분).
KBS
지난 1월 19일 방영된 KBS <선덕여왕> 제29부에서는 선덕여왕의 즉위 장면과 함께 다음과 같은 해설이 나왔다.
"우리 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여왕 등극은 신라뿐 아니라, 장자상속의 유교 통치질서가 확립된 중국과 동아시아에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여왕의 등극이 동아시아에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는 해설은, 얼핏 들으면 맞는 말인 것 같다. 이런 말이 그럴싸하게 들리는 것은 '옛날 사람들은 남존여비의 유교적 관념에 젖어 있었을 것'이라는 우리의 선입견 때문이다. 하지만, 위의 해설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선덕여왕이 등극하기 39년 전인 593년에 왜국에서는 추고여왕(소위 '추고천황' 혹은 '스이코 천황')이 즉위했다. 그는 628년까지 무려 36년간이나 권좌를 지켰다. 628년이면 선덕여왕이 등극하기 4년 전이었다.
신라와의 관계가 밀접한 왜국에서 이미 오래 전에 여왕이 출현했기 때문에, 선덕여왕이 즉위할 당시의 동아시아에서 여왕의 등극이 충격적인 사건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당시의 신라인들이 여왕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점은,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사실을 통해 쉽게 입증된다.
건국 초기부터 '여성의 리더십' 인정했던 신라 신라에서는 이미 건국 초기부터 여성의 리더십이 확립되어 있었다. 시조 박혁거세의 딸인 아로 공주가 국가 최대의 종교의식인 박혁거세의 제사를 주관한 사실에서 나타나듯이, 여성도 제사장 혹은 사제의 역할을 수행했다. 팔월 한가위에 즈음한 길쌈 시합을 주관한 것도 여성이었고, 화랑제도의 전신인 원화제도를 이끈 것도 여성이었다.
또 신라에서는 여신이 국가적으로 숭배를 받았다. 박혁거세의 부인인 알영, 제2대 남해왕의 부인인 운제, 충신 박제상의 부인인 치술은 국가적 차원의 신으로 숭배를 받았다.
한편, 위작 논란이 있는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신라에는 박씨·석씨·김씨라는 3대 왕족 외에 대원신통·진골정통이라는 2대 왕비족이 있었다. 모계 중심으로 계승되는 왕비족이 있었다는 것은, 여성의 혈통을 신성시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오래 전부터 여성의 리더십이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라인들은 여왕의 출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들이 그것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는 '옛날 사람들은 남존여비의 유교적 관념에 젖어 있었을 것'이라는 우리의 선입견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물론 신라인들이 여왕과 남자 왕을 똑같이 생각한 것은 아니다. 남자 왕위계승권자가 없는 부득이한 상황에서 여왕이 출현했다는 것은, 신라인들이 여왕보다는 남자 왕을 더 선호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여왕의 등극을 '차선책'으로 인식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들이 여왕의 등극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음을 뜻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