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묘지에서 개에게 위협당하는 나를 구해준(?) 보스니아의 꼬마들. 이 친구들이 살아갈 세상은 인종과 종교에 의한 비극이 없는 세상이었으면.
홍성식
햇살과 그 아래 새하얀 비석이 아프게 눈을 찔러오던 보스니아 사라예보의 공동묘지. 사나운 개를 쫓아준 꼬마들은 또래다운 호기심으로 내게 이것저것을 물었다. 파란 눈동자를 빛내며. 하지만 그날 어떤 질문을 들었고, 무슨 대답을 했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증발한 시간과 휘발된 기억. 그건 단지 나와 그 아이들의 힘겨웠던 의사소통 탓만은 아니었다.
저녁 식사를 위해 꼬마들이 산을 내려가고도 한참동안 더 묘지에 앉아 있었다. 시든 장미와 암녹색 이끼와 해독할 수 없는 문자가 새겨진 비석을 앞에 두고. 참담함이라고 해야 할까, 향하는 곳 분명치 않은 분노라고 불러야 할까. 당시의 심정을 아직도 명확하게 표현할 수가 없다.
어둠이 산과 묘지를 온전히 뒤덮은 다음에야 벗어놓은 슬리퍼를 찾아 꿰고 도심으로 내려왔다. 무엇을 해야 할까? 뒤집혀진 마음으론 술 마시는 것 외엔 할 게 없었다.
술을 팔지 않는 무슬림 구역을 지나 숙소에서 먼 거리에 있는 가톨릭 구역으로 허위허위 걸었다. 곁으로 '학살의 그날' 새겨진 총탄 자국 선명한 건물들이 빠르게 스쳐갔다. 보스니아 내전 기간 동안 사라예보는 세르비아계 군인과 민병대에 포위돼 있었고, 식량이나 물을 구하러 거리로 나온 배고픈 아이와 노인들은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에 생이 꺾이곤 했다.
사라예보 시내 한복판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을 담은 조형물이 있다. 그건 내전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추모하는 것이고, 총탄 자국이 흉한 건물을 리모델링 하지 않는 이유는 '그날의 슬픔'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런 구체적인 사실은 한국에 돌아와서야 알게 됐다.
마침내 도착한 가톨릭 구역. 시끌벅적한 술집의 구석자리를 잡고 술을 마셨다. 싸구려 위스키로 시작해 보드카와 맥주, 나중에는 알코올 도수가 60%에 가까운 홈메이드 보스니아 라키아(유럽산 자두나 청포도를 증류한 투명한 술)까지. 끝 모를 폭음이었다.
저녁도 거른 채 거칠게 마신 술은 엉망의 취기를 불러왔다. 주위에 앉은 보스니아 사람들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윙윙거리더니 한순간 사라졌고, 술집 앞거리가 흔들리는 환시가 보였다. 나중에는 "사람이 사람에게 이럴 수가… 사람이 사람에게 그럴 수가…"라는 혼잣말까지 지껄였던 것 같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기억의 회로가 끊겼다. 자정 가까운 시간이었지 않을까.
일그러진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