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앙정담양군청 홈페이지의 면앙정 사진. 이 사진으로 보면 면앙정은 건물이 낡고 주변이 어수선한 살풍경에 놓여 있는 듯이 여겨진다. 관광 안내용 사진은 어느 정도의 작품성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담양군
사이비를 비판한 <자상특사황국옥당화가>논어에 보면 공자가 '나는 자색을 싫어한다. 자색은 붉은색을 흐리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어떤 사람이 참으로 좋은 사람입니까'라고 묻는 제자에게 들려주는 답의 일부다.
이 대목은 문학적 비유이지만 공자는 같은 내용을 직설적으로 토로하기도 한다. '나는 향원(대략 '유지'의 뜻)을 싫어한다. 모든 이들로부터 좋은 사람이라는 칭찬을 들으려고 하는 자는 사이비이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들에게서는 착하다는 평판을 듣고, 나쁜 자들로부터는 좋지 않다고 비난받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좋은 사람이다.'
송순의 시조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자상특사황국옥당가>(自上特賜黃菊玉堂歌)라는 긴 제목의 작품이다. 공자의 '사이비' 비판을 연상시키는 이 노래는 명종이 궁궐 정원에 피어있는 가을 국화의 아름다움에 취해 황국화 한 송이를 꺾어 옥당관(玉堂官)에게 주며 노래를 지으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옥당관이 쩔쩔매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때 마침 숙직 당번으로 근무하고 사람이 송순이었다.
황국화를 바라보는 송순의 뇌리에는 '가을바람 불고 희끗희끗 서리가 내리는 날에 갓 피어난 황국화를 임금께서 은반에 담아 선비들이 공부하는 옥당으로 보내셨네. 어째서 임금께서는 황국화를 다른 곳 아닌 옥당으로 보내셨을꼬. 도리 같은 사이비들아, 꽃인 양 나서지 말라. 국화 같은 지조의 선비를 찾는 임금의 뜻을 모르겠느냐'라는 생각이 흘렀다. 그 생각을 그는 3장 6구 12음보로 표현했다.
풍상(風霜)이 섯거친 날에 갓 피온 황국화(黃菊花)를은반(銀盤)에 것거 다마 옥당(玉堂)으로 보내실샤도리(桃李)야 곳인 양 마라 님의 뜻을 알괘라옥당관은 송순의 노래를 명종께 바쳤다. 명종이 보니 너무나 뛰어난 노래였다. 그래서 누가 지었느냐고 물었다. 옥당관은 송순이 지었다고 사실대로 아뢰었다. 왕은 자신의 심정을 정확히 꿰뚫었을 뿐만 아니라 문학적 수사가 절묘한 시조를 순식간에 창작한 송순에게 큰 상을 내렸다. 많은 선비와 관료들이 그를 부러워했음이야 말할 것도 없다.
비판적 지식인으로 살아야 후학의 존경 받는다송순은 20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77세까지 벼슬을 했다. 타계한 때는 향년 91세였다. 고령에는 고향 담양에 자신의 아호가 되는 면앙정(俛仰亭)이라는 정자를 짓고서 거기서 살았다. 면앙정에는 언제나 벗들과 후학들이 찾아와 풍류를 즐겼다.
면앙정에서는 송순의 과거 급제 60주년을 기리는 회방연(回榜宴)이 열리기도 했다. 그러므로 회방연이 열렸을 때 그의 나이는 81세였다. 왕도 이 소식을 듣고는 꽃과 술을 보내주면서 처음 과거에 급제한 것과 동일하게 행사를 열라고 지시했다. 이 잔치에 정철 등 당대의 전국 명사들이 모였다. 현지의 관찰사 등이 대거 참석한 것이야 두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밤이 깊어 모두들 술에 만취했고, 이윽고 송순이 침소로 돌아갈 시간이 됐다. 이때 정철이 사람들에게 제안했다. '우리가 가마를 메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그래서 정철 등 내로라하는 나라 안 고관대작·풍류가객들이 가마꾼이 됐다. 이 일화는 송순이 선비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던 거유(巨儒)였음을 말해주는 증언으로 읽힌다.
입신양명 원하는 이들, 평상시 어떻게 살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