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의 윤선도 고택 '녹우당'
정만진
우난 거시 벅구기가 프른 거시 버들숩가 漁村(어촌) 두어집이 냇속의 나락들락 말가한 기픈 소희 온갇 고기 뛰노나다 모두 40수나 되는 연시조 대작인 <어부사시사>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각각 10수씩 노래한다. 위의 시조는 봄 노래 중의 한 수다. 고어(古語)의 의미를 정확하게 읽어내지 못하는 독자라 하더라도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배운 작품이므로 '더 이상 한가할 수 없는 마음을 절묘한 시어로 읊고 있다' 정도의 평가는 가능하다. 정말 그렇다. 과연 어느 누가 이 시를 보면서 지은이의 생애가 귀양살이로 온통 얼룩져 있다는 사실을 짐작이나 하겠는가.
보통의 시인들은 '버꾸기가 울고 버들숲이 푸르다'고 노래한다. 심지어 우리나라 최고의 이별노래로 우러름을 받는 정지상의 <送人(송인)>조차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라고 표현했다. '비 갠 긴 언덕에 풀빛이 푸르다'는 뜻이니 아무래도 시인의 판단이 문장의 '주인'이다.
그러나 윤선도는 그 수준을 뛰어넘었다. 윤선도는 '버꾸기가 울고 버들숲이 푸르다'고 말하지도 않지만 '우는 것이 버꾸기이고 푸른 것이 버들숲'이라고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우는 것이 버꾸기인지, 푸른 것이 버들숲인지, 어촌의 집이 몇 채인지, 물속의 고기 이름이 무엇인지, 그것은 윤선도에게 중요하지 않다. 게다가 사람 세상에는 집들이 '냇속에 들락날락' 하고 수중세상에는 '온갇' 고기들이, 그것도 가만히 있지 않고 '뛰노'는 풍경이라 윤선도로서는 알 수도 없다.
그렇게 모든 것들이 알 수 없는 풍경, 알 욕심도 일어나지 않는 풍경에 윤선도는 취해 있다. 제목 그대로 이 노래가 어부의 사계를 노래하였다면 어찌 그가 바닷가 집이 몇 채인지, 물 속에 노니는 고기들과 하늘의 새들, 그리고 물가 숲 나무들의 종류를 모를 것인가. 그러므로 당연히, 현대인의 눈에 윤선도는 끝없이 비인간(非人間)의 유유자적을 노래하고 있는 음유 시인으로 비친다. <어부사시사> 자체가 귀양살이 냄새라고는 한 오라기 아지랑이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노래인 까닭이다.
여름 노래를 살펴보아도 마찬가지다. 윤선도는 '년닙희 밥 싸두고 반찬으란 쟝만마라/ 靑蒻笠(청약립)은 써 잇노라 綠蓑衣(녹사의) 가져오나/ 無心(무심)한 白鷗(백구)난 내 좃난가 제 좃난가' 하고 노래한다. 반찬도 없이 맨밥을 연잎에 싸서 들고 바다를 노니는데 내가 새를 쫓는 것인지 새가 나를 쫓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다. 목적도 목표도 없는 사람만이 그런 자연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