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홍시가'가 뒷면에 새겨져 있는 시비. 주차장과 서원 사이에 있다.
정만진
<조홍시가> 역시 이덕형과 관련이 있다. 이덕형이 그에게 접대로 내놓은 홍시를 보고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한국문학사에 우뚝 선 노래를 지어 불렀다.
중국 오나라의 육적이 여섯 살 때 원술에게 유자 세 개를 받고는 몰래 품 속에 숨겨 나오다 굴러 떨어지자 '어머니께 드리려고 그랬다'고 대답한 고사를 떠올리면서, 이렇게 잘 익은 홍시를 가져간들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으니 무슨 소용이냐며 슬퍼한 것이다.
육적의 고사, 반중(盤中, 소반에 담은), 조홍(早紅, 일찍 익은) 정도의 한자어가 등장하지만 심하게 탓할 대목은 아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감옥에 갇힌 안중근 의사는 아예 한문으로 자서전을 썼다. 그보다 아득한 옛날의 박인로 아닌가. 단적으로는 '조홍시(柿)' 아닌 '조홍감' 표현만 봐도 그렇고, 시조 전체가 대부분 순수 우리말로 이루어져 있다.
연못과 솔숲이 돋보이는 서원 위치
도계서원 앞에는 적당한 크기의 연못이 자리잡고 있다. 서원 중에는 보기 드문 풍경이다. 서원 전경의 절반쯤이 물에 그림자를 담그고 있는 정취를 보노라면 무인이면서도 언제나 서민적이고 따뜻한 노래를 부른 박인로의 정서가 저절로 헤아려진다.
게다가 그 연못 바로 건너편에는 그의 묘소도 숲속에 모셔져 있어 멀리 찾아온 나그네의 마음은 더욱 애잔해진다. 애써 따져보지 않아도 자연스레 이해되는 <조홍시가>처럼 그의 묘소와 서원은 잘 익은 홍시처럼 너무나 포근하게 자연과 어우러져 있다. 죽어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이라도 이런 곳에서 살아보았으면 싶은 간절함이 샘솟는 곳이다.
박인로는 31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으로 종군했다. 그 후 39세에 무과에 급제, 선전관, 수군만호 등을 지내다가 전쟁이 끝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시를 쓰고 학문에 몰두했다. 그는 자신의 자녀가 <조홍시가>와 같은 노래를 지어 부르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래서 그런지, 서원 대문에는 남다른 안내문이 붙어 있다. 다른 서원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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