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달관 저 <진랍풍토기>. 이 책은 최근 번역되었다. 소책자이지만 이런 책이 번역되었다는 것은 인문학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백산자료원
한 가지 알아 둘 것은 이 진랍풍토기를 서구에 본격적으로 소개한 이가 바로 폴 펠리오라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가 누구인가? 실크로드 기행 중 돈황 막고굴을 이야기할 때 본 그 인물이다(관련 기사 :
<세계문명기행III: 실크로드 문명기행⑥ 여행의 하이라이트, 세계문화유산 막고굴> 참고). 막고굴 제17굴에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발견한 이 말이다.
그는 프랑스극동학원의 교수로서 1902년에 극동학원잡지(BEFEO)에 <진랍풍토기>를 <주달관의 캄보디아 견문록에 대한 비망록>이라는 이름으로 번역하여 게재한다.
위의 역사에서도 말했거니와 우리가 앙코르에 가서 불가사의한 고대 캄보디아(크메르)인의 거석문화를 보고자 한다면 적어도 위의 역사를 대표하는 유적들은 보고 와야 한다. 그래야만 앙코르를 다녀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앙코르 왕조의 초기를 대표하는 프레와 코와 바콩 그리고 반테이 스레이, 중기를 대표하는 앙코르 와트, 말기를 대표하는 앙코르 톰 등의 유적은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 속으로 증발한 앙코르, 어떻게 그런 일이?적어도 지금까지 알려진 역사적 사실은 캄보디아의 앙코르 시대는 1432년 샴족의 침입을 받은 이래 소멸되었다는 것이다. 한때 백만도 넘는 인구가 살면서 어쩌면 세계 최고의 문명이라고 할 수 있는 위대한, 아니 믿기지 않는 석조 문명을 만들어 낸 앙코르 시대가 어찌하여 그리도 소리 없이 소멸되었는가. 물론 앙코르 지역은 위의 샴족 침입 이후에도 두 번에 걸쳐 잠시 크메르족의 수도로 사용된 적이 있다.
그러나 앙코르의 영화는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고 몇몇 탐험가나 선교사들에 의해 서양에 앙코르 유적의 존재는 알려진 바 있지만 주목받지 못하고 수 세기 동안 열대 밀림 속에 잠자고 말았다. 그러다가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자연주의자 앙리무어에 의해 서양사회에 알려진 후에야 인류사의 전면에 나타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의문을 잠시 풀고 가자. 이 의문에 대한 설명은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나 대략 다음과 같은 설명을 모아 볼 수 있다.
첫째, 14세기부터 2세기에 걸친 샴족의 지속적인 침략이다. 앙코르 지역은 지리적으로 타이와 가까운 관계로 타이가 국력을 키울수록 그들을 감당하기 힘들었고 전쟁으로 인해 너무나 잦은 피해를 입었다. 그러다 보니 앙코르는 수도로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마침내 수도를 남쪽의 프놈펜 쪽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둘째, 자야바르만 7세 치하에 너무나 많은 사원의 건축이 있었고 왕족의 사치스러운 생활로 민심이 이반하였으며 마침내 중앙 권력이 약화되고 지방 권력이 점점 강력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과정을 통해 앙코르 지역은 급속도로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셋째, 잦은 전쟁은 많은 남자들의 사망으로 연결되었고 이것은 앙코르 지역의 수리 시설을 제대로 돌 볼 수 있는 인력의 부족을 가져왔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었고 앙코르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넷째, 환경적 재앙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13세기경 이 지역의 숲은 황폐해지기 시작하였고 이것은 농업생산력의 저하로 나타났다. 거기다가 가뭄과 다른 환경적 요인이 작용하여 이 지역에서 사는 것이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혹자는 전쟁으로 인한 남자의 부족으로 수리 시설을 관리하지 못하자 모기의 비정상적인 증식을 가져와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도 한다.
다섯째, 외교적으로 14세기 후반부터는 명나라와의 관계를 중시하였고 해상 무역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이런 상황은 캄보디아 북부의 앙코르 지역에 수도를 유지하는 것보다 남부의 메콩강 유역의 프놈펜이 훨씬 나은 조건이었다.
이런 설명에도 한때 100만 명 이상의 사람이 살았다는 앙코르 지역이 거의 수세기 동안 밀림으로 방치되었다는 것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세계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고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의 도시를 이루었던 앙코르가 하루아침에 지구상에서 존재를 감추고 수세기 뒤에서나 세상에 다시 등장한 것은 어떤 설명에 의해서도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미스터리이다.
힌두신과 설화에 관한 정보앙코르 유적을 탐방할 때 제일 필요한 지식이 힌두 신에 대한 정보이다. 앙코르 유적은 대개 힌두교 또는 불교, 혹은 그 결합의 소산이다. 특히 힌두교는 초기 유적지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9세기와 10세기의 유적지에서는 시바신앙이, 11세기의 유적지에서는 비쉬누 신앙이 넘친다.
그리고 앙코르 와트를 비롯한 여러 곳에 벽면 부조를 볼 수 있는데 이 부조는 하나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물론 그 당시의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전쟁, 시장의 모습, 고기 잡는 모습도 있지만 힌두의 설화를 소재로 한 것도 많다.
따라서 앙코르 여행을 하면서 이러한 힌두신과 힌두 설화를 전혀 모르고서는 무엇인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유적지의 이해를 하는 데 한계를 느낀다. 이하에서는 힌두의 주요 신과 설화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고자 한다.
▲남부 인디아 촐라 왕조의 춤추는 시바(사진 왼쪽), 12세기 캄보디아의 비쉬누(가운데), 태국의 4면상 브라마(오른쪽)
위키피디아
▲인도 마디아 프라데시에서 출토된 10세기 압사라 사암상.
위키피디아
아난타(Ananta) : 영원한 존재, 비쉬뉴가 잠을 자고 있는 동안 그의 현신으로 나타난다.
압사라(Apsara) : 천상의 요정으로 춤과 노래를 하는 신을 즐겁게 해준다.
아수라(Asura) : 힌두의 선신인 데바의 영원한 맞수이며 악신이다.
데바(Deva) : 부처의 자비를 보여 주는 선신이다. 여성신을 데바타(Devata)라고 한다.
드바라팔라(Dvarapala) : 문의 수호자로서 신전을 지키는 남신이다.
가루다(Garuda) : 새들의 왕이며 비쉬누를 태우는 영물이다. 몸통은 인간의 모습이지만 새의 날개를 가지고 있다.
칼라(Kala) : 가면을 쓴 모습의 생명체인데, 신전의 문설주에 보통 등장하며 신전의 수호자로서 역할을 한다. 큰 눈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이나 사자의 코를 갖고 두 개의 뿔을 가지고 있다. 그의 식성은 대단하여 무엇이나 먹을 수 있다.
마카라(Makara) : 거대한 바다 동물로 파충류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또한 신전의 린텔에 수호자로서 그려진다.
나가(Naga) : 뱀의 모습을 한 영물이다. 이는 가루다의 천적이다. 나가는 비와 번영을 통제하는 것으로 앙코르 신전에서 항상 볼 수 있다.
난디(Nandi) : 시바가 타고 다니는 흰 소이다.
힌두의 설화 |
힌두의 설화는 많지만 앙코르 문명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두 개의 설화만 알아보자. 하나는 라마야나이며 또 다른 하나는 마하바라타이다.
[라마야냐] 라마야나는 인도를 비롯하여 동남아시아 전역에 펴져 있는 설화이고 앙코르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기원전 200년부터 서기 200년까지 약 400년에 걸쳐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것은 앙코르 유적지의 여러 부조를 통해 볼 수 있다. 여러 가지 버전이 있으나 앙코르의 경우는 인도의 전설상의 시인인 발미키가 정리한 것이다. 그 내용은 주인공인 라마의 무용담으로 그의 아내 시타가 악마인 라바나에 의해 납치되자 라마는 형제인 락슈마나, 원숭이 군단을 이끄는 반신(半神)인 하누만의 도움을 받으며 시타를 구출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영웅적인 용기와 성품을 보여준다. <랑카의 전투>는 라마야나 설화 중에서 대표적인 이야기인데, 라마는 하누만과 수그리바가 이끄는 원숭이 군단과 연합하여 바다를 날아서 랑카섬에 상륙한다. 연합군은 라바나의 동생 비비샤나의 도움을 받아 3일간의 전투 끝에 랑카의 왕이며 삼계(三界)의 천하무적 라바나를 활로 쏘아 죽이고 시타를 구출한다. 이 이야기는 앙코르 와트 제1회랑 서회랑 북익벽에 부조되어 있다.
[마하바라타] 마하바라타는 힌두의 위대한 설화이며 이것 또한 앙코르 문명에서 영감의 소재로 널리 사용되었다. 이 설화는 인도에 뿌리를 두며 기원전 400년에 시작되어 서기 300년쯤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주된 내용은 바라타족의 왕위 계승을 둘러싼 큰 싸움을 뜻하는 전쟁 이야기이다. 이 중에서 대표적인 전투는 쿠룩세트라(Kurukshetra) 전투인데, 사촌 간인 판다바(Pandavas)파와 카우라바(Kauravas)파와의 전쟁이다. 판다바 형제의 7개 사단과 카우라바 형제의 11개 사단이 쿠룩세트라 평원에서 격돌한 18일간의 대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 모습은 앙코르 와트 제1회랑인 서회랑 남익벽에 잘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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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로스쿨에서 인권법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30년 이상 법률가로 살아오면서(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역임) 여러 인권분야를 개척해 왔습니다. 인권법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오랜 기간 인문, 사회, 과학, 문화, 예술 등 여러 분야의 명저들을 독서해 왔고 틈나는 대로 여행을 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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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앙코르 왕조, 왜 소리 없이 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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