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왕사의 당간지주가 도로 변에 서 있다. 당간지주 옆을 지나면 선덕여왕릉으로 간다.
정만진
사람들이 흔히 접근하는 낭산의 길은 사천왕사 터에서 시작된다. 사천왕사는 <제망매가>와 <도솔가>를 지은 월명사가 살았던 절로 유명하다. 피리를 잘 부는 스님이 밤에 사천왕사 앞을 거닐면서 악음을 내면 흘러가던 달이 멈춰 섰다고 전한다. 절은 사라지고 목 없는 귀부만 남았지만 사천왕사터는 사적 8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천왕사 창건은 부처의 힘으로 당나라를 몰아내겠다는 신라인들의 불심이 낳은 대역사였다. 실성왕 12년 이래 신유림(神遊林)이라 여겼던 숲이니 호국불교를 위한 거대 사찰 창건 장소로는 아주 제격이었다. 공사의 시작은 671년(문무왕 11), 끝은 679년(문무왕 19년).
'신이 노니는 숲'에 세워진 사천왕사사천왕사터에서 안으로 들어가면 선덕여왕릉으로 가는 산길이 이어진다. 사적 182호인 선덕여왕릉은 그녀가 살아 있을 때 지정한 곳에 쓴 묘소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여왕은 아무 병도 없을 때 여러 신하들에게 일렀다.
"나는 아무 해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忉利天) 속에 장사지내도록 하라." 신하들이 그게 어느 곳인지 알 수 없어서 물으니 왕이 말하였다.
"낭산 남쪽이니라."
과연 선덕은 자신이 예고한 바로 그 날에 죽었다. 신하들은 왕이 예고한 낭산 양지에 그녀를 장사지냈다. 그 10여 년 뒤, 문무대왕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를 세웠다. 불경에 '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했으니 그제야 선덕대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 수가 있었다.
선덕왕, 한국인의 가슴에 남은 아름다운 여왕왕릉 입구의 안내판에는 선덕여왕의 공적이 소개되어 있다.
'(아들이 없는 진평왕의 맏딸로 태어난 선덕여왕은)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첨성대를 만들고, 분황사를 창건하였으며, 황룡사 9층 목탑을 건축하는 등 신라 건축의 금자탑을 이룩하였다. 또 김춘추, 김유신 같은 인물을 거느리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다.'선덕여왕이 분황사를 창건한 때는 재위 3년(634)이다. 분황사(芬皇寺)는 향기로운[芬] 임금(皇]의 절[寺]이라는 뜻이다. 한국사 5천년이 낳은 향기로운 임금이라면 단연 선덕여왕이다. 지금도 선덕여왕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아름답고 지혜로운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지만, 신라 당대에도 그녀는 국민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것이 틀림없다. 본문의 일부만 삼국유사 등에 남아 있는 <수이전>의 지귀(志鬼) 설화가 바로 그 상징적 증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