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흑석동 원룸촌 일대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원룸촌. 건물이 옹기종기 붙어있어 꼭대기층이 아니면 햇볕이 들지 않는다. 이렇게 방이 많지만 '내 방'을 얻기는 힘들다.
박선희
드디어 이사를 했다. 한 달 넘게 친구방 한 켠에 쌓여있던 내 옷과 책들이 드디어 제자릴 찾아간다. 밥, 빨래, 설거지, 화장실 청소까지 하며 눈치 보던 신세를 벗어난다니, 시원하다.
얹혀 산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겉으로는 당당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미안하고, 점점 소심해진다. 머리 감을 때 보일러 켜는 것조차 여러 번 고민할 정도로. 그래서 이 찬바람 부는 가을에도 나는 찬물로 머리 감았고, 시키지 않아도 빨래와 방 정리를 했다. 생각 같아서는 "월세 반 공과금 반 내고 같이 살자"고 말하고 싶지만, 주머니 사정은 늘 사람을 조용하게 만든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인 8월 갑작스럽게 내가 서울 길바닥에 나앉기로 결정한 것은 LH전세임대주택 덕분이었다. 올해 초 신청했는데 8월 중순에 "추가 선정 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놓칠 수 없는 기회였지만, 지난 2월에 1년 계약한 자취방이 걸림돌이었다. 과감히 이사할 방도 찾아놓지 않고 1년 계약한 자취방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했다. 방학이 지나면 자취방 수요가 급감하기 때문이다.
과감한 결정 덕에 내 짐들은 나와 함께 염치없이 친구방으로 들어갔다. 처음 예상은 일주일이었는데 생각만큼 LH전세임대주택을 구하고, 계약한 뒤, 잔금 처리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결국 한 달 넘도록 친구에게 신세를 졌다.
LH전세임대주택은 LH에서 시행하는 대학생 주거안정정책이다. 간단히 말하면 학생이 전세로 계약할 집을 LH가 대신 계약하고, 학생에게 보증금과 월세를 받는 제도이다. 학생이 LH에 내야 하는 보증금(저소득층 학생은 100만 원, 일반가구 학생은 200만 원)과 월세가(최대 17만 원) 서울에서 직접 방을 구하는 것보단 매우 싸다. 이와 함께 전세임대주택의 가장 큰 매력은 전세 계약이 2년 이라는 점이다.
나는 대학을 다니기 위해 매년, 매학기 '메뚜기족'이 되어야 했다. 시험기간에 도서관 자리를 맡지 못한 학생들이 빈자리를 돌아다니며 공부하는 '메뚜기족'이 되듯, 나는 서울에서 내 한 몸 뉘일 곳을 찾아 4년간 9번 이사를 했다.
집 근처 학교를 다니는 대학생들은 모르겠지만 집에서 먼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에게 '방'은 가장 큰 스트레스다. 기숙사는 제약이 많고, 친척집과 고시원은 불편하며, 원룸은 비싸기 때문이다. 방을 못 구하면 학교도 다닐 수 없다.
2009년 제천학사로... 저렴했지만 제약이 많았다
대학에 입학하고 내 첫 이사지는 2009년 2월에 이뤄졌다. 그때 대학에 다니기 위해 '제천학사'에 입사했다. 제천학사는 충북 제천에서 수도권으로 대학을 온 학생들의 편의를 위해 지어진 기숙사다. 강원도, 제주도, 충청북도, 전라남도, 경기도 등도 비슷한 학사를 운영하고 있다. 일명 '학사' '학숙'으로 불리는 이 지역기숙사는 대부분 지자체에서 운영비를 부담하기 때문에 매우 저렴하다. 그런 이유로 입사 경쟁률이 높다. 지금은 비용이 조금 올라갔겠지만, 2009년 제천학사는 아침과 저녁을 제공하면서 한 달 월15만 원을 받았다.
물론 문제가 없진 않았다. 제천학사가 위치한 곳은 성북구 안암동이고, 내가 다니는 학교는 동작구 흑석동에 있다. 대중교통으로 최단시간 50분, 최장 2시간 정도 걸린다. 1교시 수업에 지각하지 않으려면 오전 6시에 일어나 7시에 지하철을 타야했고, 아무리 중요한 동아리 행사가 진행중이어도 밤 12시 통금에 맞추기 위해 10시면 학사로 향해야 했다.
처음엔 '이런 제약 쯤이야' 했지만 학교를 다니다보니 점점 힘들었다. 수업 조별 프로젝트 발표 준비를 하다보면 종종 밤 11시가 넘었고, 대학 학보사 활동을 하다보니 예기치 않은 일도 발생했다. 밤 12시 통금에 맞춰 들어갈 수 없는 날에는 미리 외박 신청을 하고, 학교 휴게실이나 친구방에서 신세를 졌다. 미리 외박 신청을 못해 쌓인 벌점에 퇴사 직전까지 놓여 가슴을 쓸기도 하고, 일주일에 5일을 학교 휴게실에서 자면서 '방이 있는데 왜 나는 못 갈까'하며 서러웠던 적도 있다.
사실 가장 큰 문제는 기숙사 수용 인원이 100명 밖에 안 되다보니 매해 새로 신청하는 일이었다. 당연히 이전 입사생에게 가산점을 주지 않는다. 그나마 학기 단위로 신청을 받는 학교 기숙사보다 나았지만, 새로 입사신청서를 내고 선발자 발표가 날 때까지 살얼음 위를 걷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