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심에서 바라본 드넓은 나일강 풍경
이승철
나일강은 나일 문명의 어머니다. 이 강이 없었다면 나일문명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강은 나일 문명의 모든 것을 만들어 냈다. 신을 만들어냈고 파라오를 만들어 냈다. 때문에 나일 문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일강의 문명사적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위키 백과사전의 설명을 빌리자면 나일강은 크게 두 개의 강, 즉 백나일(탄자니아 국경 부근에서 발원하여 빅토리아 호수로 흘러간 다음 이티오피아로 흐르는 강)과 청나일(이디오피아에서 흘러오는 또 하나의 강)이 수단에서 만나 이집트를 관통한다.
총 연장 6671킬로미터. 아마존강과 더불어 세계에서 제일 긴 강이다. 이집트는 전 국토의 95%가 사막이고 나머지가 바로 나일강 유역으로 이뤄진다. 사람이 살면서 경작을 할 수 있는 면적은 단 5%에 불과하다. 그러니 고대나 지금이나 나일강이 갖는 의미는 이집트인들에게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말하면 나일강은 이집트의 젖줄이다.
고대사회에서 나일강 강가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언젠가부터 통합된 사회체제를 이루기 시작했다. 이곳이 다른 지역에 비해 유난히도 강력한 파라오 체제를 이룬 것은 강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아프리카 북동부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나일강가에서 살 수밖에 없었기에 이 강의 관리는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사활이 걸린 문제였을 것이다. 만일 상류에 사는 사람들이 강을 이용해 하류의 사람들을 괴롭힌다면 당연히 하류의 사람들은 상류와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강은 통일적인 관리를 요구한다. 강가에 사는 사람들이 제각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강을 사용하면 모든 사람들이 공멸한다.
따라서 나일강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안정된 사회를 위해 강력한 통치조직을 필요로 했다. 이 조직은 당연히 상·하류를 모두 통치하는 그런 조직이어야 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나일강에서 왜 그렇게도 빨리 파라오라는 강력한 왕이 탄생한 것을 알 수 있다.
나일강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범람을 경험했다. 이것은 연중에 일어나는 정확한 자연현상이었다. 사막지대를 흐르는 강의 범람은 그것이 적정 수준이면 재앙이기 보다는 신이 준 선물이 된다. 사막지대에서 강의 범람은 주변 토지를 옥토로 만들어 풍년을 약속하는 연중행사기 때문이다. 만일 범람이 전혀 없다면 그 사막지대에서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 물론 범람의 정도가 지나치면 강가에 사는 사람들의 집과 신전을 파괴하니 재앙이다. 이 때문에 나일강의 범람은 당시 파라오에게는 재정 수입과 직결됐다. 범람의 수준이 적절하면 세금은 제대로 징수됐지만, 범람 수준이 낮거나 과도하면 세금을 깎아줘야만 백성이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나일강변의 신전에는 강의 수위를 재는 나일로미터라는 시설이 있었고 그것은 오늘날까지 여러 신전에서 볼 수 있다.
나일강의 범람은 20세기에 들어 와서도 계속됐으나 그것은 20세기 초의 아스완 올드댐과 1960년대 조성된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아스완 하이댐의 완공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이제 나일강은 세계 최대의 인공 호수인 낫세르 호수에 의해 갇히게 됐고, 하류의 범람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게 됐다. 아스완 하이댐의 완성은 물의 생산적인 사용에 도움을 줬다. 전기를 생산해 인근 국가에까지 수출을 하는 산업역군으로서의 역할을 했고, 더 이상 강의 범람으로 인한 시설물의 피해를 보지 않아도 됐다.
그러나 댐의 완성은 크나 큰 문제도 야기했다. 거대한 담수호가 생김으로써 나일강 상류의 기온변화를 초래했고, 사막 기후에 습도를 높임으로써 수천 년 동안 건조 기후에서 보존되어 온 문화유적에 상당한 문제를 야기했다. 더욱 가장 치명적인 것은 나일강가에 조성된 고대 유적지가 물속으로 수장될 운명에 처했다는 사실. 뒤에서 보게 될 아부심벨 신전이 대표적이다. 물론 유네스코와 이집트 정부의 노력으로 지금도 그 신전의 위용을 볼 수 있게 됐지만, 세계 최고의 문화유산에 심각한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다.
파라오 아래서 백성이 생각했던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