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드라마 <신의>에 나오는 공민왕(류덕환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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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폐인처럼 살았다는 그 기간에 공민왕은 아주 적극적으로 재혼 상대방을 구했다.
<고려사> '신돈 열전'에서는 "(부인과 사별한 지 1년 뒤에) 왕이 후계자가 없으므로 왕비를 구하고자 덕풍군 왕의, 산기상시 안극인, 정랑 정우, 판관 정양생의 딸들을 궐내에 데려다가 직접 골라 뽑았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왕비 후보를 심사하는 일은 왕실 여성 어른들의 몫이었다. 이런 자리에 신랑 후보가 나타나는 것조차 관행에 어긋난 일이었다. 그런데 공민왕은 단순히 참관하는 정도에 그친 게 아니라, 신붓감을 직접 심사하기까지 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후계자 문제 때문이었다. 이 점은, 부인을 잃은 뒤에도 그가 왕의 본분을 망각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둘째, 폐인처럼 살았다는 그 기간에 공민왕의 개혁은 집중적으로 추진되었다. 공민왕의 개혁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몽골과 친몽골파를 몰아낸 것이다(A). 또 하나는 수구세력인 권문세족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신진사대부들을 앉힌 것이다(B). 개혁 A는 집권 초반에, 개혁 B는 집권 후반에 크게 성취되었다.
개혁 B가 큰 성과를 거둔 시점은 노국대장공주가 죽은 지 10개월 뒤인 공민왕 14년 12월부터였다. 공직에 진출한 지 1개월 밖에 안 된 승려 신돈이 이때부터 공민왕을 대신해서 수구세력에 대한 숙청작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공민왕 폐인'설의 진실무명의 승려가 공직 취임 1개월 만에 단독으로 정계개편을 단행하는 일은 누가 보더라도 무리다. 행정·정치 경험이 전혀 없을뿐만 아니라 사회적 기반도 없는 인물이 1개월 만에 국정을 장악하는 것도 힘든데, 1개월 만에 적과 동지를 가려내어 숙청작업을 벌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공민왕이 신돈을 코치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또 신돈의 정치투쟁으로 누가 이익을 얻었는가를 계산해보면, 이 투쟁의 지휘자가 실은 신돈이 아니라 공민왕이었다는 점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신돈의 숙청작업으로 쫓겨난 이들은 공민왕의 적인 권문세족들이었고, 그 덕분에 이익을 얻은 것은 공민왕의 우군인 신진사대부들이었다. 유학자인 신진사대부들의 득세는 불교 승려인 신돈 자신에게는 별로 이롭지 않은 일이다. 신돈은 그저 공민왕의 일을 했을 뿐이다.
이것은 신돈의 정치투쟁이 신돈보다는 공민왕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만약 공민왕이 폐인처럼 살았다면, 그의 이익이 자동적으로 실현될 수 있었을까? 공민왕이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았다면, 그의 이익이 실현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신진사대부는 공민왕이 죽은 지 18년 뒤에 조선을 세웠다. 그들이 공민왕에게 항상 감사했다는 점은, 조선 왕실의 사당인 종묘에 공민왕의 신당이 세워진 이례적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신돈이 아니라 공민왕이 신진사대부의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
셋째, 폐인처럼 살면서 국정을 방치했다는 그 기간에 공민왕은 신돈을 감시하고 제어했다. 이 점은 신돈이 이상 조짐을 보이자 공민왕이 즉각 그를 제거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명성이 국제적으로 알려지면서, 신돈은 독자노선의 조짐을 보였다. 행정조직을 임의로 개편하려 하고 충주로 천도할 계획까지 세운 것이다. 이런 기운이 감지되자, 공민왕은 즉각 개입했다. 정부 관리들을 움직여 신돈에게 불리한 여론을 조성한 뒤 신돈을 전격적으로 처형했다. 공민왕이 상심에 빠져 정치에서 손을 뗐다면, 이런 일이 과연 가능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