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 당시 중국을 침공한 영국 함대(왼쪽)의 모습. 서세동점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장면이다. 중국 광주시(광저우시) 해전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1840년 아편전쟁 이후로 중국을 집중 공략하던 서양열강은 1860년대 들어 기존 전략을 수정했다. 중국을 직접 공략하는 것은 무리이므로, 중국 주변의 나라들을 먼저 공략한 뒤 중국을 치자는 쪽으로 전략을 선회한 것이다. 1866년에는 프랑스가, 1871년에는 미국이 조선을 침공한 것은 이런 전략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 전략은 1870년대와 1880년대에도 계속됐다.
그런데 1870년대에 이런 전략을 누구보다 최대한 활용한 나라는 바로 일본이었다. 일본이 1874년에 대만을 침공하고 1875년에 강화도사건을 도발하고 1879년에 오키나와를 합병한 것은 '중국 주변의 나라들을 먼저 공략한다'는 서양열강의 전략을 모방한 것이었다.
1876년 런던에서 발행된 시사 잡지에 '영국이 동아시아를 차지하려면 오키나와를 반드시 점령해야 한다'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이 기사는 1877년에 일본 법무장관 이와쿠라 도모미에게 보고됐고, 이때부터 일본은 영국에 뒤지지 않기 위해 오키나와 합병을 서둘렀다. 일본이 서세(西勢)에 편승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런데 188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은 서양의 강력한 후원을 얻지 못했다. 그냥 서양의 전략에 편승했을 뿐이다. 2류 국가였던 일본과 선뜻 제휴할 강대국은 없었다. 그러나 일본이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동아시아 최강이 되면서부터 상황이 급변했다. 일본이 서양열강을 스폰서로 끌어들일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것이다.
먼저, 일본은 청일전쟁 이후인 1896~1898년에 러시아와 공조했다. 이 기간에 일본은 러시아와 공동으로 조선 정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 1898년에는 '조선은 일본이 차지하고, 만주는 러시아가 차지한다'는 러일협정을 체결했다. 자국이 단독으로 조선을 장악하는 것에 대한 러시아의 동의를 끌어낸 것이다.
1882년 개항 이래 만신창이가 된 조선은 1897년에 대한제국을 선포하는 등 다소 회복의 조짐을 보였다. 하지만, 일본이 러시아의 동의 하에 조선을 단독 장악함에 따라, 대한제국 선포는 공허한 것이 되고 말았다.
얼마 안 있어 일본은 서양 스폰서를 러시아에서 영국으로 교체했다. 1902년에 제1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영국을 스폰서로 만든 것이다. 그 뒤 일본은 러시아와의 약속을 파기했다. '조선은 일본이, 만주는 러시아가 확보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던 일본은, 만주까지 장악할 목적으로 1904년에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다. 새로운 스폰서를 확보한 다음에 기존 스폰서를 버리는 치밀함을 보여준 것이다.
서양 '스폰서' 등에 업고, 동아시아 변방에서 세계 정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