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암 안에 들어가면 제단이 놓여 있다. 아마도 처용을 제사지낼 때 쓰기 위해 설치해 둔 것 같다. 나무 사이로, 세죽마을이 있었던 곳에 공장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광경이 보인다.
정만진
'서울에서 바다까지 집과 담이 줄곧 닿아 있었고 초가는 한 채도 없었다. 피리소리와 노래가 길을 따라 끊이지 않고 이어졌으며, 사시사철 날씨까지 좋았다.' 지상낙원과도 같은 이 풍경은 과연 언제, 어느 나라의 이야기일까? 원문인 '自京師至於海內 比屋連墻無一草屋 笙歌不絶道路 風雨調於四時'가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는 사실을 알면 대략 짐작할 수가 있을 터이다.
삼국유사는 신라 헌강왕(875∼886) 때가 그처럼 태평성대였다고 증언한다. 삼국사기도 맞장구를 친다. 헌강왕 6년(880)의 신라는 '京都民屋相屬 歌吹連聲', '今之民間 覆屋以瓦不以茅 炊飯以炭不以薪'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울은 민가가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악기소리가 끊이지 않으며' '민간에서는 기와집을 지을 뿐 띠를 덮지 않으며 숯으로만 밥을 지을 뿐 나무를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삼국유사의 일연과 삼국사기의 김부식이 한결같이 그렇게 말하니 아니 믿을 수도 없겠지만, 그러나 미심쩍은 것 또한 사실이다. 다른 책도 아닌 삼국사기가 그로부터 불과 10년 뒤인 889년의 신라를 가리켜 '가는 곳마다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所在盜賊蜂起)'고 기술하고 있으니, 어쩔 것인가. 889년 원종, 애노, 891년 양길, 궁예, 892년 견훤…… 태평성대와는 거리가 아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