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하얀정글>
제유필름
#4.한씨는 2004년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살던 아파트를 담보로 4000만 원을 대출 받아 2년여 동안 치료를 받을 수 있었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결국 이자를 갚지 못하게 되자 아파트는 경매로 넘어갔고, 한씨는 어머니와 함께 월세 20만 원짜리 집으로 옮겨야 했다.다행히 2006년 자가골수이식 수술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러나 병원은 수술 보증금으로 2000만 원을 요구했고, 돈을 마련할 수 없던 한씨는 결국 치료를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3년 뒤인 2009년 3월 한 씨는 어머니를 홀로 남겨둔 채 아주 먼 곳으로 떠나갔다.다큐멘터리 <하얀 정글>(연출 송윤희)에 등장하는 여러 사연 가운데 하나로, MBC <PD수첩>(2009년 4월 14일)에 방영된 내용이기도 하다.
더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한씨가 죽기 전 그 동안 지불한 치료비 4000만 원에 대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진료비 확인을 요청한 결과 약 1900만 원이 부당 청구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병원에서 요구한 수술보증금 2000만 원에 맞먹는 금액이다. 그러나 한씨는 결국 이 돈을 돌려받지 못한 채 죽었다.
<하얀 정글>은 이처럼 돈이 없어 치료를 포기해야만 하는 이들의 안타까운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의 의료 현실을 아프게 꼬집는다. 국공립병원을 비롯한 공공 의료 기관의 비율이 전체의 7.3%(2010년) 밖에 되지 않으며, 국민건강보험이 감당하는 의료비의 비율(보장율) 역시 62.7%(2010년)에 그치고 있는 우리의 열악한 공공 의료 체계가 이 같은 안타까운 죽음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2010년 한 해 동안 우리나라 국민이 쓴 의료비, 즉 국민의료비는 82조 7000억 원이었고, 이 가운데 국고 지원이나 사회보험 등 공공재원에서 나온 공공의료비는 48조 3000억 원으로 국민의료비 대비 58.2%에 그쳤다. 다시 말해 나머지 41.8%에 달하는 의료비는 고스란히 환자 개개인이 부담할 수밖에 없었다. 국민의료비 대비 공공의료비의 OECD 평균이 72.2%라는 사실과 비교하면 우리 국민이 짊어져야 하는 의료비 부담이 얼마나 무거운지 짐작할 수 있다. 중간에도 한참 못 미치는 것은 물론, 우리보다 못한 나라는 칠레, 멕시코, 미국 세 나라뿐이다(보건복지부 <국민의료비추계 및 국민보건계정>, 2012 OECD Health Data).
<하얀 정글>은 우리의 현실을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하얀 정글>이 정말 보여주려 한 것은 사실 우리 의료의 미래다. 이른바 '의료 선진화(민영화)'가 불러올 참담한 미래.
의료 선진화 정책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하나는 주식회사 삼성병원과 같은 영리법인 의료기관을 세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민간보험 시장을 지금보다 더 키워 국민건강보험을 대체하도록 하는 것이다. 민영화란 말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정부는 아직까지도 그럴 생각이 없다고 발뺌을 하지만, 지난 4월 경제자유구역 내 외국병원의 개설과 운영 등을 규정한 시행규칙을 입법 예고함으로써 인천 송도를 비롯한 우리나라 6개 경제자유구역에 국민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영리법인 의료기관을 세울 수 있도록 했다. 의료 선진화 정책의 첫 삽을 뜬 셈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나라 의료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하얀 정글>은 이렇게 그리고 있다.
"우선 수익성이 떨어지는 진료는 없어진다. 생명과 직결된 응급실이 축소된다. 중환자실도 최소화 된다. 대신 성형외과 등 수익성이 높은 진료는 고도로 발전한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간호사 수를 줄인다. 이 모든 것으로 생긴 수익은 영리 병원 투자자에게 배당금으로 돌아간다. 즉, 자본 투자자의 수입을 늘려주게 된다. 주식회사 병원들은 작은 중소기업 병원들을 합병하게 된다. 그러면 전국의 병원들이 대기업 산하로 계열화 된다. 이 병원들은 자기네 보험에 가입한 환자만 보려할 것이다. 그러면 건강보험을 들고 가는 사람들은 퇴짜를 맞는 것이다."우리 모두 '돈 안 되는 환자'와 '돈 없는 환자'일 수 있다드라마 <골든 타임>이 '돈 안 되는 환자'인 중증 외상 환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면, 다큐멘터리 <하얀 정글>은 '돈 없는 환자'인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돈이 안 되거나 돈이 없다는 이유로 살아갈 기회를 잃어버린 이들의 이야기, 그리고 언젠가 당신과 나, 또는 우리 곁에 있는 누군가가 겪을지도 모르는 이야기들이다.
마침 대선을 앞두고 대한민국 복지의 새로운 판을 짜려는 노력들로 분주하다. 얼마나 진정성을 가지고 매달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 의료의 새 판을 짜기 위한 다시 없을 좋은 기회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박근혜 후보는 1970년대에 건강보험(의료보험) 제도를 만든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아버지로 두었다. 문재인 후보는 영리법인 의료기관 허용을 비롯한 의료 산업화 정책을 처음으로 들고 나왔던 참여정부에서 일했다. 그리고 유력한 대선 후보 중에 한 명인 안철수 교수는 의사 면허를 가진 전직 의사다. 다들 우리 의료의 미래에 대해 할 말들이 참 많을 것이다.
비단 이 세 사람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지겠다고 나선 여러 후보들이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을 대한민국 의료의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일지 무척 궁금하다. 앞으로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일이다. 5년이나 10년 쯤 뒤에 <골든 타임>을 다시 보면서, 우리나라 병원들도 한때는 저렇게 따뜻한 곳이었다고 안타깝게 돌아보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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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옆 앞 '기찻길옆골목책방' 책방지기.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수도권에서 살다가 2022년 전북 익산으로 이사해 지방 소멸의 해법을 찾고 있다. <로컬 혁명>(2023), <로컬꽃이 피었습니다>(2021),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2020), <줄리엣과 도시 광부는 어떻게 마을과 사회를 바꿀까>(2019), <나는 시민기자다>(2013)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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