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디 스와이어즈(Randy Swyers), 페트리샤(Patricia) 부부여행 시작 후 처음으로 금전적 지원을 받았다. 랜디 아저씨가 쥐어준 20달러로 그날 저녁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있었다.
최성규
편안히 밤을 보냈을 사람들이 통나무집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랜디 스와이어즈(Randy Swyers), 페트리샤(Patricia) 부부도 개를 데리고 아침 산책을 나왔다. 이들과 나 사이에는 특별한 연결 고리가 있다. 이제 어엿한 26살의 여인으로 성장한 따님이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자녀가 없었던 이 부부는 생후 3개월 된 아기를 입양해 친자식 못지않게 길러냈던 것.
"주원미라고 하지. 마지막에 '미'자가 한국어로 아름다움을 뜻한다며?" 사람도 연어처럼 회귀본능이 있는 것일까. 부모와 자식 사이의 정은커녕 얼굴도 모르는 생모를 찾기 위해 그녀는 지금 한국에 머물러 있다. 그녀는 생모를 만났지만, 한국을 좀 더 느끼고 싶다며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있단다. 랜디 아저씨가 아이패드로 딸의 블로그를 보여줬다. 거리를 거니는 그녀의 오른편에 '원조 순대국밥' 간판이 눈에 띈다. 두 달 후에 미국으로 돌아오면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 보따리를 품고 올지 궁금해진다.
딸과 동향이라는 이유로 나는 반가운 손님이 됐다. 덕분에 형편없는 공용 화장실 대신 깔끔한 숙소 화장실을 쓸 수 있었다. 아침식사로 커피와 시리얼까지 대접받았다.
공립학교 부부 교사였던 랜디와 페트리샤는 은퇴 후 한가롭게 정취를 맛보고 있는 중이다. 이곳 블루 리지 파크웨이(Blue ridge parkway)는 이들이 매년 꼭 들르는 휴식처다. 전몰장병 추모일(Memorial day·5월 마지막 월요일)인 오늘(5월 28일)이 3일 연휴의 마지막 날이라 사람들이 짐을 싸서 떠나는데 이들은 꿈쩍 않는다. 5월 30일까지 머물면서 근처를 찬찬히 둘러볼 예정이란다.
통하는 사람끼리는 인종과 나이, 국적을 초월하는 법이라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덕분에 출발 예정 시각이 2시간이나 연기됐다. 부랴부랴 텐트를 접고 자전거에 짐을 꾸린다.
랜디 아저씨는 중간 경유지인 렉싱턴(lexington)까지 태워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특별한 상황이 아닌 이상 차에 의존하면 자전거 라이더의 위신이 말이 아니게 된다.
중천에 떠오른 태양이 지켜보는 가운데 페달을 밟기 시작한다. 10마일을 이동해 블루 리지 파크웨이(blue ridge parkway)를 벗어난다. 애팔래치안 트레일이 관통하는 곳이라 마지막 순간까지 내리막길을 허용하지 않는다. 파크웨이 출구를 나서면서 SR 56으로 들어선다. 베수비우스(vesuvius)까지 4마일 동안 1500피트를 하강한다. 조금 전까지 기합이 단단히 들어갔던 다리는 할 일이 없고, 브레이크를 잡는 손가락만 분주하다.
중간 기착지인 렉싱턴(Lexington)에 도착할 즈음 맹렬한 더위 때문에 온몽이 건오징어처럼 말라버렸다. 주스 한 통을 사 목젖을 열어젖힌 채 단숨에 원샷. 쉬어갈 만한 타이밍이지만 늦은 출발시각 때문에 조금도 지체할 수 없었다.
Interstate 81에 도달했다. 아래로 뚫린 터널을 통과해 CR(County Road) F-055 도로를 탔다. 경계선 하나를 두고 차들과 나란히 달린다. 뭐든지 함께 나눠야 좋다지만 자동차와는 도로를 공유하고 싶지 않다. 이번에는 고속도로 위로 난 다리를 통과해 CR F-054 도로를 탄다. 짧은 시간 동안 차들이 맹렬하게 질주하는 도로를 왼쪽 오른쪽으로 껑충껑충 넘나든 셈이다.
'City limit, Buchanan, pop 1233.' 반가운 도로 표지판이다. 처음으로 하루 100km 주파에 성공했다. 작고 한적한 마을 옆으로 제임스 강(James river)이 흐른다. 인근 대여점에서 카누를 빌린 피서객들이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땀에 절어버린 나도 옷을 입은 채 강으로 뛰어든다. 목욕과 빨래를 동시에 하는 일거양득의 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