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서민 가족. 한성백제박물관에 전시된 밀랍 인형들.
김종성
헌강왕의 사례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9세기 후반의 신라 정부는 서민경제의 위기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진성왕 때 가서 국고가 텅 비는 사태에 직면했던 것이다.
기존 체제에서 출세하는 것보다, 기존 체제를 뒤엎는 데 소질을 가진 인물들은 이런 위기를 결코 놓치지 않는다. 그들은 이것을 위기가 아니라 기회로 생각한다. 궁예와 견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신라 국고가 텅 빈 889년으로부터 2년 뒤인 891년, 양길이 이끄는 반란군의 중간보스인 궁예는 독립부대를 이끌고 10여 개의 강원도 군현(시군구)을 공략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듬해인 892년에는 견훤이 전라도에서 세력을 확장하며 '후백제 부활'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경제위기를 발판으로 세력을 확장한 궁예와 견훤은 결국 후고구려 및 후백제를 세웠다. 신라는 예전의 소국으로 도로 축소되었다. 서민경제 파탄이 한민족 정치지형을 크게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고려 말인 14세기와 조선 말인 19세기에도 서민경제는 도탄에 빠졌다. 특히 19세기에는 전국에서 민란이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날 정도였다. 그런 민란의 결정판이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었다. 가계경제의 위기가 혁명의 발발로까지 연결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14세기와 19세기에는 서민경제 파탄이 국가 붕괴로 직접 연결되지 않았다. '서민경제 파탄'과 '국가 붕괴' 사이의 인과관계를 방해하는 외부요인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14세기에는 원나라와 명나라가 고려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고려 서민들이 국가체제를 붕괴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19세기에는 일본과 청나라가 동학농민군을 방해했기 때문에, 농민전쟁이 조선 멸망으로 직접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9세기 후반과 10세기 초반에는 신라 문제에 큰 영향을 미칠 만한 외세가 없었다. 당나라가 이리저리 찢겨서 지방할거의 양상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당나라가 멸망한 907년 이후에는 중국이 5대 10국의 분열기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국내문제에 대해 입김을 행사할 만한 강력한 외세가 없었기 때문에, 신라의 서민경제 파탄이 국가 붕괴로 직접 연결될 수 있었던 것이다. 궁예·견훤 같은 영웅들이 민중 속에서 튀어나와 새로운 왕조를 창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배경 때문이다.
서두에서 "서민경제 파탄이 국가 붕괴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시기는 9세기 말"이라고 했다. 이것은 9세기 말과 10세기 초에는 서민경제 파탄과 국가 붕괴 사이의 인과관계를 방해할 만한 외세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서민경제를 살리고자 한다면?이처럼 외세의 영향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서민경제가 붕괴될 경우, 서민경제 파탄이 국가 해체로 직접 연결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러므로 서민경제 파탄은 단순히 서민들의 불행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국민 전체의 불행으로 연결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상류층의 불행으로도 이어질 수밖에 없다.
서민경제를 살리고 대한민국을 살리고자 한다면, 가장 일차적인 해법은 서민경제에 애착을 갖는 사람들에게 향후 5년을 맡기는 것이다. 서민들의 빚과 파산을 자신의 빚과 파산처럼 가슴 아파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미래 5년을 신탁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첫 출발이다.
'국민경제=상류층 경제' 혹은 '국민경제=특정업계 경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정권을 맡겨놓고 뒤늦게 "경제를 왜 이 모양으로 만들어놓았냐?"고 따진다면, 듣는 사람들은 의아하고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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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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