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화차>의 한 장면.
보임
2005년 겨울. 나는 인(in)서울을 했다는 기쁨이 있었다. 주위에서도 다들 서울로 학교를 가게 됐다며 축하해 주었고 동네에서는 내가 자랑이었다. 부모님께도 자랑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렇게 들뜬 마음은 입학통지서를 받고 등록금 고지서를 받기 전까지만 허락됐다.
등록금 고지서를 받은 날 나는 심각해졌다. 대학을 다니려면 이렇게나 많은 돈이 필요하구나. 우리 집에서 이 돈을 낼 수 있을까? 괜히 서울 사립대를 가려고 했나. 그냥 근처 국립대를 갈 걸 그랬나. 재수를 할까? 어떡하지?
그날, 아빠가 나를 조용히 불렀다. 그리고 나에게 말씀하셨다.
"딸내미, 아빠가 진짜 미안한데. 첫 등록금은 아빠가 내주고 싶었는데. 이번에 농사가 잘 안 돼서... 그 정부에서 해주는 대출 있다던데, 그거 받으면 안 될까? 미안하다. 이런 아빠라서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아빠의 말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첫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 그리고 나의 찬란하리만큼 돈에 시달리는 20대가 그렇게 시작됐다.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인 나는 과에서도 동아리에서도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 그런데 과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다 보니 하루에 쓰는 돈이 늘어 점점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 만나는 자리를 피하게 되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게 되었다. 점차 과에서 친한 친구가 없어졌고, 드라마에서 보던 즐거운 캠퍼스 라이프는 진짜 드라마 이야기가 돼 버렸다.
갈빗집, 일식집, 보조강사, 과외, 방청객, 설문지알바, 전단지배포, 중고생 멘토링, 화상과외, 편의점 등 그동안 했던 알바도 참 다양했다. 학교 갔다가 알바 하러 가고 다음날 다시 학교가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사실 학교를 못 간 날도 많았다. 알바하면서 너무 피곤한 적도 많았고 돈 많이 주는 당일 알바 자리가 들어오면 학교 수업보다 알바를 선택했다.
매 학기 아빠와의 대화 "한 번만 더 학자금 대출...""이번 한 번만 더 학자금 대출받는 걸로 하자. 미안하다.""아니에요!" 매학기 시작할 때쯤 아빠와 나누는 대화다. 뭐, 남들이 발렌타인 데이, 화이트 데이 챙기는 것처럼. 초복, 중복, 말복에 의례 몸보신 하는 것처럼 나는 3월과 9월 개강하기 전에 아빠와 대출금과 관련한 이야기를 한다.
나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대출금 이자가 밀리고 있습니다. 빨리 내세요. 안 내시면 신용불량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9시 뉴스에서나 들었던 단어인 신용불량자. 신용불량자가 될 수도 있다니. 그 전화를 받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한참을 울었다. 뭔가 이런 전화가 앞으로 끊이지 않을 것만 같아 불안하고 무서웠다.
몇 년 전. 아빠가 내 생일날 서울에 올라오셨다. 같이 점심을 먹었고, 친구들과 함께 먹으라며 케이크도 사줬고 용돈까지 주고 가셨다. 아빠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라기도 했지만 행복했다. 정말 나랑 밥만 먹고 아빠는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그리고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 암이란다. 내일 병원에 입원하기로 했는데 네가 맘에 걸려서 서울 갔나보다. 아빠 어떡하니. 아빠가 너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울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화상통화였다.
"생일 축하하고 돈 많이 못줘서 미안하다. 아프지 말고 잘 지내." 아빠는 암 수술을 받으셧다. 누가 이런 일이 닥칠 줄 알았을까. 보험 만기가 다 됐으나 연기하지 않았고, 암 수술에 어떤 혜택도 받을 수 없었다. 내 2학기 등록금을 내주려고 아빠가 모아두었던 돈은 고스란히 수술비로 들어가게 됐다. 물론 내가 모아두었던 돈도 보태야 했다. 그래도 모자란 돈은 고스란히 빚이 되었다. 병원 옥상에서 아빠께 휴학할 거라고 이야기했다.
"아빠, 나 2학기 때 휴학할게요." "됐다. 휴학하지 마라." 국가장학금 신청, 초과 학기 학생 해당 안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