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값등록금 실현을 위해...' 비지땀 흘리며 108배반값등록금국민본부 안진걸·김동규 공동집행위원장이 제헌절인 17일 낮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헌법에 따라 평등한 고등교육권 확보와 반값등록금 실현을 위한 108배를 하고 있다.
권우성
나의 대학 입학은 드라마틱했다. 1학기 수시 불합격, 2학기 1차 수시 불합격, 2학기 2차 수시 불합격. 불합격 행진은 정시에도 계속됐다. 가군 불합격, 나군 불합격, 다군 불합격. 그나마 예비순위를 준 대학은 나군에 접수한 대학뿐이었다. 어영부영 성적 맞춰 대학가긴 싫었지만, 모두 떨어지고 보니 불안해졌다.
지역 소도시에서 자영업을 하시는 부모님은 나를 상경시켜 재수공부 시킬 만큼의 여력은 없었다. 가까운 도서관에서 혼자 공부하면 되겠지만, 연년생 동생이 있어 내년에 한꺼번에 대학에 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복잡한 마음에 우선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재수를 하든, 대학을 가든 부모님한테만 의지할 수 없는 게 내 형편이었다. 대학 합격 발표가 나기 전부터 하고 있던 사무보조 아르바이트에, 야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추가했다. 아침 9시부터 6시까지, 또 밤 12시부터 아침 8시까지. 잠자는 시간 빼고 하루 17시간을 일했다.
그러던 와중에 2차 추가합격으로 합격 통지를 받았다. 합격통지를 받고도 입학까진 쉽지 않았다. 합격 통지 다음날 오후 4시까지 등록금을 입금해야 입학이 확정되기 때문이었다. 수업료와 입학금을 합친 등록금은 450만 원. 하루 17시간 일해 번 돈은 고작 100만 원 안팎이었다. 어디서라도 빚을 내야 했다.
다행히 학자금 대출 제도를 알고 있었지만, 대출도 만만치 않았다. 합격 통지 받은 대학의 등록금 수납 은행이 내가 사는 지역에 없었다. 부랴부랴 은행이 있는 지역을 찾고, 1시간 가량 차를 타고 가서 대출을 받고, 다시 인터넷 뱅킹을 통해 등록금을 입금했다. 마감시간 10분 전 아슬아슬하게.
어렵게 들어온 대학... '빈곤팔이'의 시작 그렇게 어렵고 힘들게 들어온 대학이건만, 나는 매 학기 등록금 납부 시즌이 되면 이 아슬아슬한 전쟁을 반복하는 느낌이다. 첫 학기 등록금 450만 원에 대한 이자는 매월 2만 5천원. 2009년 최저임금인 시급 4000원을 기준으로 약 6시간 넘게 일을 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다. 8학기를 다녀야 졸업할 수 있는데 매 학기 돈을 빌릴 때마다 이자는 늘어날 것이었다. 입학금을 뺀 350만 원을 대출해 이자가 2만 원으로 줄어든다 해도, 이자 부담은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입학 첫 학기 내 용돈은 겨울 방학 내내 번 100만 원이 전부였다. 한 달에 20만 원씩 쪼개 써도 아껴써야 할 판이었다. '더 이상 이자를 낼 순 없다!' 그때부터 내 아슬아슬한 '빈곤 팔이'가 시작됐다.
등록금 부담을 없애기 위해 장학금을 받아야 했다. 우리나라에서 장학금을 받으려면 열심히 공부하며 빈곤을 팔든지, 적당히 공부하며 빈곤을 팔든지, 아르바이트 하며 빈곤을 팔면 된다. 어쨌든 결론은 '가난을 PR'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건강보험료지출내역서를 떼고, 파산신고서를 떼고, 가족관계증명서로 다자녀 가구임을 인증 받는다.
학교에서 주는 면학장학금에도, 교외 재단에서 주는 장학금에도 이런 서류들이 꼭 필요하다. 1년에 많을 땐 10번도 서류를 뗐던 것 같다. 서류를 제출한다고 모두 장학금을 주는 것은 아니다. 어디서 어떻게 장학금을 줄지 모르니 조건만 맞으면 다 집어넣어 보는 것이다. 그렇게 장학금을 받으면 다행이고, 받지 못하면 빚이 쌓인다.
장학금도 선순환이다. 한 번 받으면 경제적 부담이 적어지니 아르바이트를 줄일 수 있고, 그럼 공부할 시간이 늘어나 성적이 좋아지고, 다음에 장학금 받기 쉬워진다. 결국 장학금을 한 번이라도 못 받으면 경제적 부담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늘려야 하고, 공부할 시간이 줄어 성적이 안 좋아지고, 다음에 또 장학금을 받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고향에서 벗어나 대학을 다닌다는 건, 대학을 위한 기회비용으로 주거비, 생활비, 등록금이 모두 필요하다는 말이다. 곧 이 중 하나라도 없다면 공부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250만 원 받던 장학금 '반토막'